꿈속의 키스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5화

by rainon 김승진

장세연 후보 포스터 귀퉁이에 적힌 약력을 읽어 내려가던 이지가 조그만 탄성을 내질렀다. 맞네. 너구나, 세연이. 장세연. 근데 얼굴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돈 어지간히 들었겠다. 그래도 잘 고쳤네. 의학의 힘은 대단해.


유세 차량 무대 위에서 쉰 목소리를 쥐어짜며 간절하게 한 표 지지를 호소하는 고교 동창 장세연. 이번 지방선거 최연소 시의원 후보를 한동안 물끄러미 올려보던 안이지는 다시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피곤하다. 가서 라면이나 끓여 먹고 저녁까지만 한 숨 자자.


혹시 모를 배탈이 걱정되어 아침도 굶었던 이지는 라면 한 그릇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결과적으로 시험은 무사히, 그리고 아주 잘 치렀지만... 대체 이 무슨 황당한 상황이었던가. 조심 또 조심, 하루도 안 거르던 아침식사도 패스했건만, 어젯밤 이후 시험장에 가기까지 먹은 것도 하나 없는데 시험 시작하자마자 급 설사라니... 그리고 그보다 더 기가 막혔던... 그 이후의 2분. 급성 배탈을 해결해 준 선물 같은 2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고, 누구도 믿지 못할 그 2분. 아무도 절대 알 수 없는 그 2분. 꿈을 꾼 것만 같다는 생각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낮잠 속으로 이지는 잠겨 들어갔다.


아주아주 오랜만이었다. 꿈속에서 이지는 8년 전, 고등학교 2학년 교실로 돌아가 있었다. 갑자기 교실은 영화관으로 변했다. 뭔가 와글와글 티격태격 잡다한 고교 시절의 사건들 수백 편이 동시에 상영되는 영화관 안. 동서남북 네 면을 가득 채운 것은 수백 대의 흑백 TV. 흑백 TV들은 제각기 10분짜리 단편영화들을 상영하고 있었다. 이지는 어지러웠다. TV들에서 쏟아지는 영상과 소리들이 뒤엉킨 빛과 소음의 도가니에서 도망치려 영화관 출구를 찾았다. 넘어질까 바닥을 보며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서 보니 비상구를 향해 이지 앞에서 걷고 있는 두 사람. 풋풋한 십대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겼던 ‘은잔’ 영화 동아리 ‘은막 위 잔물결’의 운영진 둘. 오늘 몇 년 만에 만난 그 둘. 앞서 가던 유태연과 장세연이 이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둘은 이지가 보는 앞에서 격렬한 키스를 나눴다. 이지는 잠에서 깨어났다. 후...


저녁 7시. 바 <쁘렘>은 아직 텅 비어 있었다. 석 달 여 만에 얼굴을 보는 가게 주인 은옥은 다이어트에 성공한 모습이었다. 이지를 맞는 표정의 반가움과는 정반대로 은옥이 짐짓 퉁명스럽게 핀잔을 던졌다. “너 그만두고서 단골들이 몇 명이나 떨어져 나갔는지 알기나 해?” 이지가 맞받아쳤다. “가게 단골 떠난 게 내 탓이야? 백일 만에 얼굴 본 동생한테 그게 사촌이 먼저 할 말이냐? 공부하느라 고생했다. 시험은 잘 봤느냐. 뭐 이런 게 먼저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시험은 잘 봤어? 붙을 거 같아?” “면접관 따귀만 때리지 않는다면. 저녁은?” “뭐 먹을래? 시켜 먹자.”


김밥과 떡볶이로 뚝딱 저녁을 해결하고 나니 어느새 8시를 넘어 있었다. 바는 원래 초저녁 손님이 드물다. 삼겹살집이나 파전집에서 1차를 거나하게 걸친 술쟁이들이 꼬부라진 혀로 한잔만 더! 를 외치며 찾는 곳. 때마침 삼겹살 기름 냄새를 물씬 풍기는 두 중년 남자가 들어와 바에 앉았다. 머리가 벗겨진 뚱뚱한 사내와 뿔테 안경 너머로 눈을 껌뻑거리는 금붕어같이 생긴 키 큰 남자. 자리에 앉으며 이지의 얼굴을 본 대머리 뚱보의 입꼬리가 귀로 향했다. 시험 전 막바지 백일을 빼고 이 가게에서 2년 가까이 일한 바텐더 이지는 이제 들어서는 손님들의 관상만 봐도 견적을 뽑아낼 수 있었다. 진상인지 아닌지, 으스대면서 비싼 양주를 주문할 건지 얌전히 맥주만 마시고 갈 건지, 이지에게 노골적인 추파를 던지며 연락처를 물을 건지 말 건지, 듣기 더러운 음담패설을 떠벌일 건지 말 건지... 대머리 뚱보는 그 모든 악조건들의 교집합임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대머리 뚱보가 음탕한 눈깔로 이지를 핥듯이 위아래로 훑어보며 삼겹살 냄새 나는 첫마디를 날렸다.


“오~ 새로 왔나? 우리 쭉빵쭉빵 귀요미~ 오늘 오빠랑 찐하게 한잔 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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