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냑에 젖는 밤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6화

by rainon 김승진

아니나 다를까 대머리 뚱보가 음탕한 눈깔로 이지를 핥듯이 위아래로 훑어보며 삼겹살 냄새 나는 첫마디를 날렸다. “오~ 새로 왔나? 우리 쭉빵쭉빵 귀요미~ 오늘 오빠랑 찐하게 한잔 하까?”


“어머! 저 오늘 수영복 입은 것도 아닌데, 어쩜 눈이 아주 좋으신가 봐? 제 몸매가 예술인 건 또 어찌 아셨을까? 근데 오빠가 사는 거예요? 저 비싼 거 마셔도 돼요?”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이지의 눈웃음에 대머리 뚱보는 헤헤거리며 어쩔 줄 몰라했다. “아하! 우리 귀여운 아가씨. 성격도 참 좋네! 이름이 뭔가?” “에이 이름은 좀 더 친해지고 나서 서로 알아가는 거지~ 뭘로 드릴까요? 오빠?” “이 가게에서 제일 비싼 양주로 하나 가져와!”


바 뒤편 주방으로 들어가는 이지의 입가에 상쾌한 비웃음이 지나갔다. 걸려들었다. 변태 호구. 적당히 비위 맞춰 주면서 오늘 백일 만에 출근한 김에 매상이나 좀 올려주자. 주방에서 마른안주와 얼음을 챙기던 은옥도 이지를 향해 씩 웃었다. “실력 녹 안 슬었네? 니가 있어야 가게가 된다니깐. 하여튼 넌 참 재주도 좋아. 응? 아주 그냥 손님 스타일에 딱 맞춤형으로 쥐락펴락 갖고 노니.” “잘 아네. 알면 좀 더 챙겨 줘.” “야 이제 곧 공무원님 되실 니가 좀 이 언니 좀 챙겨주라, 야.”


깔끔한 미모와 세련된 화술, 취객의 마음까지 읽어내는 공감 능력. 바텐더 안이지를 한 번 본 손님들은 예외 없이 바를 다시 찾곤 했다. 이지가 막바지 공무원 시험 준비에 몰두하느라 가게를 쉰 백일 동안, 바에 들어서던 단골들이 발길을 돌렸다는 사촌언니 은옥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비록 마음에도 없는 연기를 하는 것이었지만 이지는 바텐더로서 손님을 응대하는 시간만큼은 혼신을 다해 집중해서 일했다. 진상 취객들을 어르고 달래고 적당히 겁주는 능력도 수준급인 베테랑 이지에게 다른 가게 주인들의 고액 스카우트 제의도 끊이지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친자매처럼 가까이 지내온 사촌 은옥의 가게를 떠날 생각이 이지는 없었다.


대머리 뚱보와 키다리 금붕어도 이지의 매력에 금세 푹 빠졌다. 그와 함께 90만 원짜리 코냑 한 병도 금세 비워졌다. 전작(前酌)이 적잖았던 뚱보와 금붕어의 뇌는 이미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원래 웬만한 남자 뺨치는 주량의 이지, 백일 동안 금주하느라 간 기능이 만-렙을 찍은 이지, 취객들 몰래 적당히 술을 버리는 스킬도 마법사 풀 레벨인 이지를 당해내는 손님은 지금껏 아무도 없었다. 숯불 위 오징어 몸통처럼 빙글빙글 꼬인 혀로 뚱보가 외쳤다. “여기 같은 걸로 한 병 더!!!” “오빠. 더 취하기 전에 계산 먼저 하면 안 될까?”


금붕어는 카드와 함께, 뚱보는 거드름과 함께 명함을 건넸다. “자! 이제 우리도 귀요미 이름 좀 알자. 응?” “설희라고 해요. 민설희. 전 명함 같은 건 없어요.” 뚱보는 지역 언론 한산타임즈 편집국장 박봉술, 금붕어는...? 공무원이네? 한산시청 감사담당관 사무관 강혁찬.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민설희라는 가명과 가면을 쓴 안이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화장 좀 고치고 올게요.”


화장실에서 돌아와 보니, 바에 앉은 두 꽐라는 담배를 피우며 속닥속닥 뭔가 심각한 대화중이었다. 이것들이... 담배는 나가서 피울 것이지. 그렇게 진지하게 얘기해봤자 내일 아침에는 하나도 기억들 못할 거면서, 웃기는 놈들. 이지는 다시 설희가 되어 두 꽐라를 마주 보며 바 안쪽에 앉았다.


“그러니깐 말야, 지금 분위기가 응? 현병규가 시장 재선이 될 가능성이 당초 예상보다 점점 높아진단 얘기지. 손철기 쪽에 일찌감치 줄 선 6급, 5급들이 떨고 있다는 거야. 근데 이미 늦었어. 현병규 그 독사 자식이 이미 블랙리스트를 손에 쥐고 있거든. 그거 누가 만들었는지 알아? 내 작품이야, 그거!” 그나마 덜 취한 듯 보이는 금붕어가 뚱보에게 술을 정중히 따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형님! 저는 형님만 보면서 갑니다. 제 동기들 중에서 제가 사무관 승진 젤 먼저 했습니다. 저 욕심 안 부립니다. 순리대로만! 저 올해 말에 서기관 승진 자격 채웁니다. 지금처럼만 도와주십쇼. 형님!” 뚱보가 금붕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혁찬아. 나도 너밖에 없다. 이놈아. 근데 이번 달 광고가 안 들어온다. 그 새로 온 언론홍보팀장 새끼 말야. 젊은 놈이 너무 뻣뻣해!” “아! 형님! 제가 당장 월요일에 불러서 조지겠습니다. 걱정 마십쇼!”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이지는 이렇게 바 <쁘렘>에서 배워 나갔다. 술에 취한 중년 남자들의 대화에는 대략 세상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이지는 바텐더 일이 좋았다. 얼마나 더러운지를 알아야 덜 당하는 것이 세상 이치니까.


대충 대화를 마무리한 두 남자가 다시 이지에게 관심을 돌렸다. 이미 두 번째 코냑 병이 바닥을 보이면서 두 남자의 이성도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먼저 밑바닥을 보인 건 뚱보였다. “아가씨~ 이름이 머랬지? 암튼 우리 이쁜이~ 오늘 오빠랑 자자. 2차 가자. 오빠 잘 해~ 오빠가 또 커요 커! 끝내줄 자신 있다고~” 이런 멘트가 나오면 이지는 딱 1번만 참는다. “아휴. 오빠. 오늘 너무 드셨네. 다음에 또 여기서 만나요. 이제 들어가셔야죠?” 뚱보가 뭐라 대꾸를 하려 하는데, 뒤따라 술떡이 된 키다리 금붕어가 대신 망언을 쏟아냈다. “야! 오늘 밤 형님 모셔라. 이 분이 누구신지 알기나 해? 응? 영광인 줄 알아~ 마담 불러! 내가 호텔비랑 2차 떡값 계산할 테니까!”


호텔... 떡값... 이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이제 들어가세요. 형님 모시고 끝내주는 하룻밤 떡 즐기는 영광은 당신 딸한테나 주시고!” “뭐? 이게 감히 어디서. 야! 이 미친년아! 다시 짖어봐. 이 개 같은 년아! 뭐 딸?? 니가 우리 수영이 알아?” 금붕어처럼 생긴 시청 감사담당관 강혁찬이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는 이지를 향해 잔에 든 술을 확 뿌렸다. 이지는 침착하고 담담하게 코냑 세례를 맞았다. 그리고는.


잔을 들어 금붕어에게 똑같이 술을 확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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