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와 시녀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8화

by rainon 김승진

“가게 내부 CCTV가 있어요. 보시면 누가 먼저 술을 뿌렸는지 확인이 될 거구요. 제가 알기로는 먼저 뿌린 쪽이 폭행죄 아닌가요? 저는 정당방위였어요. 그리고 여기... 다 들으려면 좀 길어요. 저희는 CCTV랑 이걸 증거로 낼게요. 저희도 고소합니다. 무고죄, 폭행죄, 업무방해죄. 저희 가게 서비스 좋아요. 주신 사랑을 따블로 돌려드리죠. 되로 받으면 말로 드리지요.”


이지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오~ 새로 왔나? 우리 쭉빵쭉빵 귀요미~ 오늘 오빠랑 찐하게 한잔 하까?”


한산타임즈 박봉술 편집국장과 한산시청 강혁찬 감사담당관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숙취해소제 100만 병의 효과를 본 두 취객의 꼬리가 화들짝 내려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뚱보의 혓바닥이 갑자기 쫙 펴진 것 같았다. “어이, 최 경감님. 강 과장 이놈이 너무 취해서... 서로 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 이쯤에서 응? 서로 응?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이봐. 사장님, 아가씨.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게 생각해. 이 정도로 그만 합시다들.”


“저한테 먼저 술 뿌리신 것. 사과하시죠. 사과하신다면 생각해 볼게요.” 강혁찬 감사담당관을 노려보면서 이지가 또박또박 말했다. 뚱보 박봉술이 금붕어 강혁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똥 씹은 표정의 금붕어가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한 마디 했다.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이제 됐어요. 사과 받아들이겠어요. 다음에 또 저희 가게 놀러 오세요. 저희 뒤끝 없어요.” 이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제 저희는 가 봐도 되는 거죠? 가자, 언니.”


“술 좀 곱게 마셔들! 너네도 내일모레가 환갑이다. 또 이러면 그땐 안 봐줘!” 파출소장의 핀잔을 뒤통수로 맞으며 뚱보와 금붕어도 경찰서를 나섰다. 밤길 저편으로 멀어져 가는 이지와 은옥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박봉술 편집국장이 내뱉었다. “아주 맹랑한 계집애일세. 녹음을 해? 내 저년 한번 확실히 밟아줘야지.” 그러다 뭔가 아차 싶은 뚱보가 금붕어를 돌아보았다. “야. 강 과장아. 아까 내가 거기 바에서 현병규 시장 블랙리스트 건 혹시 말했냐?” “네. 말씀하셨죠.” 박봉술 편집국장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이런... 다 녹음된 거 아냐? 저년 핸드폰에?” “너무 염려 마십쇼. 형님. 뭐 저런 술집 꼬마애가 뭘 어쩌겠어요?” “그냥 술집 여자애 같지가 않아서 그래. 아까 말하는 거 못 들었어? 무고죄, 업무방해죄 어쩌구... 아무튼 거 참 신경 쓰이네. 에잇.”


이지와 은옥이 가게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야. 정리는 내일 와서 하자. 가자. 기분도 그런데, 소주 각 1병씩만 먹고 들어가자.” 은옥이 핸드백을 챙겨들며 말했다.


모락모락 뜨끈한 김을 토하는 해장국이 둘 앞에 놓이자, 은옥이 소주병을 땄다. “욕봤다. 에휴. 백일만에 출근해서 험한 꼴 보느라 고생했다. 시험 보느라 힘들었을 텐데... 내가 다 미안하다. 그래. 한 잔 해. 근데 발표가 언제야?” “필기 합격자 발표 나고, 면접 보고, 최종 합격자 발표 나고... 아마 첫 출근은 9월 초라고 하던데?”


소주 한 잔을 쭉 들이켠 은옥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 나야 너무 서운하고 아쉽지만... 너도 계속 술집 알바만 할 순 없지. 공무원 첫 출근 할 때까지만 좀 도와줘. 그 사이에 내가 사람 새로 구할 테니.” “아직 면접시험 남았어. 면접에서 떨어지면 나 계속 언니네서 일해야 해.” “야. 오늘 필기는 자신 있게 봤다며? 어느 눈 삐뚤어진 면접관이 우리 이지를 떨어뜨리겠냐? 응? 한산시 최강 미모 안이지를 말야.”


은옥과 자신의 잔을 채우며 이지가 대답했다. “한산시 최강 미모라... 글쎄 바뀔지도 모르겠는데? 최연소 여성 시의원 장세연이 당선된다면 말이지. 나 오늘에서야 알았다. 걔 시의원 나왔드라? 아까 낮에 봤어. 걔 유세하는 거. 얼굴 심하게 고쳤던데?” “맞아. 나도 포스터 보고 깜짝 놀랐어. 그래. 걔가 글쎄 선거에 나오다니. 한동안 안 보이던 애가... 그새 성형은 또 언제 했는지? 결국 감투 쓰려나 봐. 들리는 얘기로는, 새정치당에서 전략 공천으로 꽂았대. 나이 젊은 여자, 참신한 이미지로 민다고 하드라. 걔 아마 시의원 될 것도 같아. 당에서 기호 가번 줬으니까. 무슨 빽인진 몰라도... 가만 그런데... 어머머. 걔 진짜 시의원 되면 어떡하냐? 장세연이 시의원 되고, 안이지는 시의회 속기사 되는 거야? 세상에.”


이지는 픽 웃으면서 잔을 털어 넣었다. “그게 뭐 어때서? 걔는 걔 일하고 나는 내 일하고 각자 월급 받는 거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국물을 호로록 마시며 은옥이 대답했다. “그래도 좀 그렇잖아. 너네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니가 더 잘 나갔었잖아. 공부든 얼굴이든 뭐든. 응? 그때만 해도, 야, 안이지가 공주고 장세연이가 시녀라고들 그랬었는데.”


“풉. 그럼 이제 장세연도 공주 된 거지. 뭐. 걔가 공주 된다고 내가 시녀가 되나? 걔는 걔고 나는 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이지의 속마음은 씁쓸해지고 있었다. 공주와 시녀, 시녀와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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