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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6월의 애벌레 – 제9화

by rainon 김승진

“풉. 그럼 이제 장세연도 공주 된 거지. 뭐. 걔가 공주 된다고 내가 시녀가 되나? 걔는 걔고 나는 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이지의 속마음은 씁쓸해지고 있었다. 공주와 시녀, 시녀와 공주...


“근데 있잖아. 나...” “응? 뭔데?” “아... 아니야. 아무것도.” “싱겁긴... 한 병만 더 할까?” 시험장에서 감독관 태연을 봤었다는 얘기를 하려다가 이지는 꿀꺽 삼켰다. 은옥에게 태연 얘기까지 꺼내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6년 전의 그 일이 자신을 다시 덮쳐 올 것이 싫어서 이지는 입을 다물었다.


그 시각. 태연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태연은 휴대폰을 꺼내 사진첩을 열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결국 지우지 못한 6년 전의 사진 폴더. 사진 속 이지와 태연은 활짝 웃고 있었다. 수능시험을 마친 다음날. 이지의 생일. 이지와 태연 둘이 입 맞추는 사진을 찍은 건... 그래 맞아 세연이었지. 그리고 그 며칠 후에... 그 일이... 그날 그 일이 있고, 그리고서 이지와 헤어졌다. 단짝이던 세 사람의 관계가 파국을 맞았던... 그 11월... 학교 영화 동아리 ‘은막 위 잔물결’, ‘은잔’의 창단 멤버 세 친구는 씻지 못할 상처를 서로서로에게 남기고 졸업과 함께 뿔뿔이 헤어졌다. 그리고 6년이 지난 지금. 장세연은 시의원 선거에 출마했고, 안이지는 시의회 속기직 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다. 선거에, 그리고 시험에 각각 당선되고 합격한다면... 둘은 어쩔 수 없이 한 직장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나는? 대부분 선택받은 직원들만 간다는 의회사무과로 전보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시청 바로 옆 건물인 의회 청사에 그 두 여자가 지근거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태연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리고... 그 답답함의 한편을 비집고 이지에 대한 그리움이 다시 솟아났다. 6년 전, 그 사건만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태연은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 한 캔을 꺼냈다. 남극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를 한 번에 털어 넣고 태연은 캔을 찌그러뜨렸다.


다음날 일요일. 선거 3일 전. 공설운동장에서 공차는 조기축구회원들, 공원에서 아침운동을 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줄잡아 3백 명이 넘는 시민들과 악수를 하며 명함을 돌린 시의원 후보 장세연은 김밥 한 줄로 서둘러 아침을 때우고 선거 사무실을 나섰다. “후보님! 어디 가세요? 이따 10시에 당 선대위 회의가...” “시간 맞춰서 참석할게요. 잠깐 어디 좀 다녀올 데가 있어서.”


5분 정도 달린 세연의 차가 도착한 곳은 한산타임즈 사무실이었다. 변두리 구시가의 낡은 2층 건물 뒤편에 차를 세운 세연은 혹시라도 자신을 따라오거나 지켜보는 시선은 없는지 주위를 잠시 살폈다. 일요일 아침의 한산시 외곽은 마냥 한산하기만 했다. 세연은 계단을 올라가 신문사 현관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아. 장 후보 왔구만. 지금 1분 1초가 아까울 때인데, 이 늙은이를 보자고 하고... 아침은 드셨는가?” 대머리 뚱보 편집국장 박봉술은 숙취해소제 빈병을 쓰레기통에 던지며 세연을 맞았다. “어제 약주 하셨나 봐요?” “나야 뭐 술이 물인 놈 아닌가? 내 이름이 괜히 봉술이가 아니여. 허허. 그래. 이제 막바지인데... 어때 분위기는 좀 괜찮은가?” “선거라는 게... 마지막 투표함 뚜껑 열기 전까지 알 수가 있나요. 뭐. 그저 최선을 다 하는 방법밖에는...”


박봉술 국장과 마주 앉은 세연은 심호흡을 했다. 이 느끼하게 생긴 능구렁이 사이비 기자 놈이 밥 한 번 먹자는 제의를 단칼에 거절했던 한 달 전이 떠올랐다. 그때 못 이기는 척, 술 한 잔 살 걸 그랬나... 아직 늦지 않았다. 이런 놈한테는 정공법으로 치고 나가야 한다. 벌려라 아가리. 니가 원하는 것, 입에 쳐 넣어주마. 세연은 핸드백에서 봉투를 꺼냈다.


“이게... 뭔가?” 탐욕으로 범벅이 된 누런 눈깔을 짐짓 휘둥그레 치켜뜨며 박봉술이 흰 봉투를 받아 열었다. “진즉에 저녁 한 번 모셨어야 하는데... 계속 정신없이 바쁘다 보니... 선거 끝나고 꼭 한 번 제대로 자리 만들겠습니다. 약소합니다. 우리 한산시는 한산타임즈와 국장님 없으면 안 됩니다. 정론직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셨으면...”


깍지 낀 두 손에 턱을 괴며 박봉술이 장세연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우리 한산시가 제대로 발전하려면 장 후보 같은 젊은 피가 한산시 혈관을 타고 돌아야지. 암. 그래. 내가 뭘 도와주면 될까?”


“기사 하나만 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면 게재는 시간상 어렵더라도, 인터넷판 기사로... 그리고... 한산고 총동문회... 회장님으로서, 한 번만 화끈하게 밀어주십시오.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화끈하게...라... 그거 좋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그거야. 화끈하게! 그래. 우리 장 후보. 안 그래도 내가 눈여겨보고 있었어요. 실력이나 미모나 우리 장세연이 1등 아닌가? 오늘 저녁에 내가 장세연이 기획기사 하나 내지. 그리고 봐서 내일쯤에 내 동생들이랑 저녁을 먹지.”


“감사합니다. 국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근데 선거 끝나고 말이야. 우리 장 후보랑 둘이서 조용한 데서 꼭 저녁 한 번 같이 했으면 싶은데.” “물론이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꼭.”


만족스러운 미소가 오가면서 두 사람은 악수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박봉술의 더러운 왼손은 마주 잡은 장세연의 손등을 도마뱀처럼 어루만졌다. 순간 소름이 끼쳤지만, 세연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때였다. 박봉술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어댔다.


“여보세요. 응. 그래... 괜찮아 말해...... 뭐라고??? 노조가? 블랙리스트??? 야! 현병규! 그 정도는 시장인 네놈이 알아서 막았어야 하는 것 아냐??? 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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