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6월의 애벌레 – 제10화
그때였다. 박봉술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어댔다. “여보세요. 응. 그래... 괜찮아 말해...... 뭐라고??? 노조가? 블랙리스트??? 야! 현병규! 그 정도는 시장인 네놈이 알아서 막았어야 하는 것 아냐??? 임마!”
세연의 귀가 크게 열렸다. 노조, 블랙리스트, 현병규 시장. 키워드 셋만으로도 대강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선거 시즌에 더욱 기승을 부리는 공무원들의 줄 서기, 한산시도 예외는 아니다. ‘스마일 스네이크’라는 별명. 그 이름값 하는 뱀 놈 현병규가 살생부를 만들었구나. 그걸 공무원노조에서 캐치한 거고... 같은 당, 새정치당 후보가 사고를 쳤다. 선거 막바지 악재. 규모와 파장이 어느 정도일지... 세연은 스마트폰 포털 뉴스 검색창을 열었다. ‘한산시, 공무원, 블랙리스트’ 그새 기사가 등장했구나. 뚱보 박봉술과는 앙숙, 현병규 시장과는 원수지간인 우리신문에서 이미 긁었다. 떨어지는 가랑잎도 조심해야 하는 투표일 직전인데... 공무원들도 유권자다. 그 가족과 친구들까지 포함하면... 지방선거 정당 공천 출마는 이 지점이 쥐약이다. 제 아무리 혼자서 잘해도 같은 당 다른 후보가 문제를 일으키면 뜻하지 않은 연대책임을 뒤집어쓰게 되는...
통화를 마친 박봉술이 스마트폰을 소파에 던졌다. “병규가 사고를 쳤어. 기호 1번 손철기 쪽에 붙은 공무원 놈들 명단이 샜나 봐. 노조에서 지랄 발광을 하나 봐. 에이. 바보 같은 새끼. 이런 머저리가 무슨 시장을 한다고... 가만. 정재호 이 새끼가 벌써 냄새 맡은 거 아냐?”
“우리신문 정재호 국장이 이미 기사 날렸어요. 지금 제가 확인했어요.” 다시 스마트폰을 손에 쥐려던 박봉술이 세연을 흘깃 바라보았다. “빠르네. 장 후보.” 세연이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기사를 보니, 노조에서 입수한 것은 출력물 문건인 것 같아요. 문제는 파일이 작성된 컴퓨터인데... 혹시라도 수사 시작된다면 시장실 컴퓨터부터, 아 지금 선거기간이라 현직 시장이라 해도 시장실 못 들어가는 거 맞죠? 그럼 자택이나 측근 컴퓨터 압수수색 들어갈 가능성이 높겠죠. 물론...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요. 블랙리스트 작성이 직권남용죄가 되는지 여부도 판례들이 엇갈려서 실제 수사나 처벌로 이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선거 앞두고 정치적인 타격이 문제죠.” “장 후보, 똑똑하네. 역시 한산시에 꼭 필요한 인재라니까. 늙다리 퇴물들 싹 다 경로당에 보내고 우리 장 후보 같은 사람들이 의회에 들어가야 하는데 말야.” “감사합니다. 국장님. 그럼 전 이만... 회의가 있어서.” “그래. 어서 가 봐. 남은 3일 체력이 중요해. 젖 먹던 힘까지, 끝까지 힘내라구. 파이팅!”
사무실을 나서는 장세연의 뒷모습을 보며 박봉술이 중얼거렸다. “어린 년이 제법이네. 일취월장 싹수가 보여...” 그리고는 눈을 감고 살생부의 생산과 이동 경로를 복기했다. 1주일 전 PC방에서 직접 작성해 출력했다. 그대로 문건을 현병규에게 건네줬다. 동네 PC방 컴퓨터들을 모조리 압수 수색해서 포렌식 않는 한, 완전 삭제한 최초 파일은 절대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절대 복사도 하지 말고 문건 관리에 신중하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대체 어떻게 그게 노조 손에 들어간 걸까. 어차피 엎질러진 물. 이제 와서 유출 경로를 따져 봤자다. 현병규가 손 안의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대포폰이니까 이건 문제없고, 현병규 휴대폰은 아이폰이니 자동 통화 녹음도 안 될 테고. 오케이. 현병규만 입을 놀리지 않는다면 불똥이 내게 튈 일은 없다. 가만... 그런데... 어젯밤 그 술집 그 맹랑한 계집애. 걔 휴대폰에 녹음되어 있을 텐데???
그 시각. 행락철 계곡 환경 정화 근무를 마친 유태연은 사무실로 돌아와 잔업을 위해 컴퓨터를 켰다. 행정시스템에 접속하자마자 태연은 노조 익명게시판을 열었다. 좀 전 계곡에서 쓰레기를 줍다가 과 직원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 “시장이 손철기 후보 편에 선 직원들 명단 작성했대!” “기사도 났던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살생부에 오른 사람들은 정화수 떠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해야 하겠네? 시장 연임되지 말게 해 달라고.” “지방자치제도 없애야 해. 줄 선 인간들은 뭐 그러고 싶어서 줄 섰나? 공무원들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목숨이지 뭐.” 역시나, 노조 익명게시판은 폭탄을 맞은 듯했다. 졸지에 시장 선거 사이버 대리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치하는 것들이란... 이놈이나 저놈이나 웃기게 놀고들 있구나... 말단 8급 태연으로서는 누가 시장이 되든 말든 별 상관도 관심도 없었다.
오후 5시 반. 일을 마친 태연은 저녁 술 약속을 위해 시청 주차장에 차를 버리고 사무실을 나섰다. 일취월장. 일요일에 취하면 월요일에 장난 아닌데... 과음하지 말자 생각하면서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태연을 누군가 툭 쳤다.
“안녕하세요. 유태연 주무관님! 오랜만이네요. 기호 2-가번 시의원 후보 장세연입니다. 찍어 주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