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 벅(June Bug) : 6월의 애벌레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11화

by rainon 김승진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태연을 누군가 툭 쳤다. “안녕하세요. 유태연 주무관님! 오랜만이네요. 기호 2-가번 시의원 후보 장세연입니다. 찍어 주실 거죠?”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얼굴... 어차피 마주칠 수밖에는 없지만, 그래도 그 시기를 최대한 늦추고 싶었던 얼굴... 장세연. 순간적으로 태연의 뇌리를 스쳐가는 것은, 6년 전 11월 중순의 그날 밤, 잊지 못할 그 사건. 태연은 짐짓 태연하려 노력했다. 빙긋이 웃으며 명함을 건네받고 악수를 나눴다. 6년 만에 잡은 손. 세연이 태연의 손을 꽉 쥐었다. 손으로 뭔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세연은 태연이 아픔을 느낄 정도로 강하게 태연의 손을 잡았다.


예전의 장세연이 아니다. 모르고 본다면 성형수술을 했는지조차 눈치 채지 못할 만큼, 그녀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름다워져 있었다. 잡은 손의 악력만 강해진 것이 아니었다. 눈빛과 말투... 전혀 다른 사람이다. 6년 전, 학창 시절, 수줍다 못해 늘 어딘가 주눅 들어 있어 보일 정도로 내성적인 그 옛날의 세연이 더 이상 아니다. 수수하고 평범하던 얼굴과 옷차림은 180도 변해 있었다. 화사하고 세련된 화장으로 치장한 얼굴의 미소는 당당했고 선거운동 재킷 안쪽 회색 블라우스는 딱 봐도 명품이었다. 가장 변한 것은 눈빛이었다. 조심스럽고 다소곳하기만 했던 눈망울에는 이제 자신감과 승부욕이 가득 차 있었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는 태연의 등을 향해 세연이 작지 않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또 봐요!” 못 들은 척, 태연은 발길을 재촉했다. 일취월장... 일요일에 취하면 월요일에 장난 아닌데... 오늘 술 좀 마시겠구나.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기분에 잠긴 태연이 일요일 저녁 술 약속 장소를 향하는 그때, 이지는 바 <쁘렘>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간밤에 대머리 뚱보와 키다리 금붕어가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가게 바닥을 쓸고 닦고, 미처 못 했던 설거지를 마친 이지와 은옥이 저녁을 뭘로 먹을지 사뭇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때였다. 왠지 잔뜩 지쳐 보이는 기색의 젊은 남자가 가게로 들어섰다. 손님이 없는 바 내부를 두리번거리던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례합니다. 지금 영업하나요?”


“네네. 어서 오세요. 편하신 곳에 앉으세요. 손님.” 메뉴판과 물 한 잔을 남자 앞으로 가져가며 밝게 웃는 이지가 빠른 속도로 처음 보는 남자를 스캔했다. 단역 TV 탤런트라고 해도 자연스러울 잘생긴 외모에 훤칠한 키. 상당히 피곤해 보이기는 했지만 남자의 눈매는 맑고 날카로웠다. 옷차림은 평범했지만 전체적으로 귀티가 나는 인상의 남자가 메뉴판 끝 페이지를 펼치며 이지에게 말을 걸었다. “저... 혹시 칵테일도 되나요?”


“그럼요! 어떤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맥주, 양주 손님이 90%인 <쁘렘>에 칵테일 주문이 들어온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은근히 이지는 반가웠다. 웬만한 칵테일 레시피는 다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엄연히도 조주기능사 자격을 가진 이지가 바텐더로서의 존재감을 만끽할 수 있는 건, 양주 뚜껑을 딸 때가 아니라 칵테일 틴을 쉐이킹 할 때였다.


“글쎄요. 제가 술 종류는 잘 몰라서요... 너무 독하지 않고... 또 무난한 맛으로 바텐더 님이 하나 추천해 주신다면 좋겠는데요.” 바텐더 님... 하... 말 한마디로 천 냥을 갚는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로구나. 불과 하루 전에 뚱보 편집국장 박봉술과 금붕어 사무관 강혁찬에게서 이년 저년 쌍욕을 들었던 이지는 마음이 따뜻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신이 난 이지의 머릿속으로 추천할 만한 칵테일 하나가 떠올랐다.


“준 벅. 어떠세요? 우리말로는 6월의 애벌레라는 뜻이죠. 빛도 초록이고 맛도 초록인 술이에요. 알코올 도수도 적당하고... 한 번 드셔 보시겠어요?” “네. 좋아요. 그걸로 부탁드립니다.” 중저음의 목소리에 다정하고 품격 있는 어조. 2년 가까이 바 <쁘렘>에서 일하는 동안 만나본 중에서 단연 첫인상이 가장 괜찮은 손님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지는 재료와 도구를 준비했다. 멜론 리큐르, 말리부, 크렘 드 바나나, 파인애플 주스, 사워 믹스를 칵테일 틴에 넣고 흔드는 이지의 손놀림과 표정은 경쾌했다. 이런 손님들만 온다면, 공무원보다 바텐더가 더 행복한 직업일 텐데... 글라스에 따르고 보니, 칵테일 준 벅의 빛깔은 오늘 특히나 더욱 고왔다.


“6월의 애벌레...라고 하셨죠? 이 이름?” “네, 맞아요. 6월의 애벌레. 색깔 이쁘죠? 아. 간단히 같이 드실 마른안주 좀 가져다 드릴게요.”


룰루랄라 주방으로 들어가는 이지를, 은옥이 뒤따랐다. “야, 너 너무 티 나는 거 아니냐? 왜? 니 스타일이니? 아주 그냥 입이 귀에 걸렸구나. 니가 이렇게 손님 앞에서 진심으로 웃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야.” “내가 뭘? 점잖고 예의 바르니까 나도 그렇게 대하는 거지.” “근데... 저 사람...” 은옥이 잠시 갸우뚱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맞다! 나 저 손님 봤어!” “어디서?” “맞아. 분명해. 내가 명함도 받았어. 저 남자 시의원 후보야.” “??? 시의원 후보가 지금 여길 왜 오냐? 선거운동하기도 바쁠 텐데.” “맞다니깐!”


궁금함을 못 참고 후다닥 주방 밖으로 걸어 나간 은옥이 훈남 손님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저기요. 죄송한데... 혹시 이번 선거 나오신 분 아니신가요?”


준 벅 한 모금을 천천히 음미하던 남자는 잠깐 당황한 것 같았지만, 이내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 알아봐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기은석 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니, 근데 지금... 선거운동 한창 바쁠 시간 아니신가요?” “그냥 잠깐 쉬고 싶어서요. 좀 피곤하기도 하고... 당선되느냐 마느냐는 뭐... 운명이 정하는 대로 따라갈 뿐이죠. 갑자기 시원한 칵테일 한 잔이 생각나서 들어온 겁니다. 오래는 못 있죠. 이것만 마시고 다시 나가봐야죠.”


준 벅 한 잔을 마저 다 비운 시의원 후보 기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맛이 참 좋아요. 선거 끝나고 아마 다시 한번 올 것 같네요. 그럼 안녕히들 계세요.” 가게 문을 나서는 기은석 후보의 뒤통수가 시야에서 사라지도록 이지는 눈을 떼지 못했다. “언니, 진짜 쿨하다. 저 남자. 자기 찍어달라는 소리 한마디를 끝내 안 하네. 명함 한 장도 안 주고. 왠지 멋진데?”


그 시각. 새정치당 시장 선거사무실. 한산타임즈 편집국장 박봉술은 현병규 시장과 단 둘이 마주 앉아 있었다. 박봉술이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3천만 원만 준비해. 당장. 오늘 밤에 내가 노조 위원장을 만나서 담판 지을 테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살생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