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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돈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12화

by rainon 김승진

새정치당 시장 선거사무실. 한산타임즈 편집국장 박봉술은 현병규 시장과 단 둘이 마주 앉아 있었다. 박봉술이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3천만 원만 준비해. 당장. 오늘 밤에 내가 노조 위원장을 만나서 담판 지을 테니까.”


현병규 시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종이컵을 입가로 가져갔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가뜩이나 선거 막바지라 김밥 값도 모자라는 판에. 에이... 이 커피... 야! 내가 커피 믹스 바꾸라고 말했냐? 안했냐? 엉?” 사무실 바깥에 서있던 선거 사무장이 후다닥 현병규 시장에게로 다가와서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정신이 없어서... 당장 사 오겠습니다.” “됐어! 임마! 두 번 말하게 하지 좀 마라. 제발! 나가 있어!” 종이컵에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마저 삼키고 현병규가 말을 이었다. “그거 살생부 소문 좀 나면 어때서? 그래 봤자 직원들 일부만 동요할 텐데... 그거 틀어막자고 쌩돈을 3천이나 쓰자고?”


박봉술은 새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너 시장실 방 아주 뺄래? 지난주 여론조사에서 오차범위 안이기는 해도, 너 손철기한테 밀렸던 거 까먹었냐? 이 덩어리 큰 떡밥을 손철기가 그냥 구경만 하고 있을 것 같아? 3천이 아니라 3억이라도 써야 할 판에... 어차피 재선 성공하면 3천은 돈도 아니잖아? 뭘 처먹어야지 똥이라도 만들지.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냐? 코딱지만 한 담배꽁초 불씨가 빌딩 무너뜨리는 거야. 동해물을 퍼와서라도 꺼야 해. 당장!”


현병규 시장이 투덜거리며 마지못한 듯 전화기를 열었다. “최 사장. 나야. 미안한데 3천 지금 당장 필요하다. 좀 급해...... 골치 아픈 한 놈 입만 막으면 게임 곧 끝나. 아. 그래. 너랑 내가 하루 이틀 볼 사이냐? 내년에 여기저기 삽 뜰 일 많아. 최 사장 니네 포크레인들 고생 좀 하게 해야지. 그래. 응...... 지금 필요해 당장. 그래. 고맙다. 친구야!” 건설기계 업자와 통화를 마친 현 시장이 박봉술에게 내뱉었다. “제대로 처리해! 뒤탈 안 나게.”


2시간 뒤. 박봉술 편집국장의 차는 시 외곽 인적이 드문 거리 카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시동을 끄고 박봉술은 조수석에 놓인 쇼핑백을 열었다. 5만 원 권 100장 다발 6개. 잠깐 뭔가를 생각하던 박봉술은 그중 돈다발 2개를 꺼내어 조수석 수납함에 밀어 넣었다. “2천이면 충분하겠지.” 피식 웃으며 박봉술은 쇼핑백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노조 위원장 주민철은 카페로 들어서는 박봉술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밝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 오랜만입니다.” 주민철과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박봉술이 카운터를 향해 외쳤다. “아메리카노 하나, 라떼 하나!”


“선배님 기억력 좋으신 건 여전하시네요. 제 커피 취향까지 잊지 않으시고.” “됐고. 시간 아끼자. 안 돌리고 바로 말할게. 그거 블랙리스트 어디서 난 거야?” “어디서 나온 건지 보다 더 본질적인 건, 더 중요한 문제는... 누가? 왜? 그걸 만들었느냐? 아닐까요?” 노조 위원장이 싱긋 웃었다.


“야. 민철아.” 한 숨을 길게 내쉰 박봉술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바다 밑바닥을 기어 다니는 뱀처럼 무겁고 차가운 목소리는 물속인데도 건조했다. “노조 위원장 완장 차더니 너 좀 컸다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 말야. 길게 얘기 안 할게. 시장이 누가 되든 넌 내가 죽인다. 나 박봉술이야. 어디 새까만 후배 새끼가 건방지게. 니 팔이랑 다리 이산가족 만들어 줄까?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끈적끈적 공구리에서 헤엄치게 해 줄까?”


박봉술의 눈에 맺힌 살기를 그대로 느낀 노조 위원장 주민철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지역 폭력배였던 박봉술의 숨은 과거, 쉬쉬 소문으로만 전해오는 깡패 박봉술의 막장 이력을 새삼 떠올린 주민철은 섬찟 시선을 테이블로 떨궜다. 라떼 잔을 쥐려는 주민철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놓치지 않은 박봉술이 잔인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를 이어갔다.


“니가 할 일은 오줌 싸고 터는 것보다 더 쉬워. 오늘 내로 노조 위원장 명의 성명 하나만 발표하는 걸로 해. 성명서 문안은 내가 다 준비해 왔다. 고맙지? 세상에 이런 선배가 어딨냐? 성명서 내용은 내가 바로 기사화해서 뿌릴 테니까, 넌 그냥 아가리 닥치고 가만히 있기만 해. 기자들, 특히 우리신문 정재호 새끼 전화는 절대 받지도 마. 간단하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주민철의 얼굴.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모습을 잠깐 유심히 보던 박봉술이 목소리 톤을 바꿨다. “어차피 시장은 현병규가 된다. 너 6급 된 지 얼마나 됐지? 사무관 승진 최소 3년 내가 앞당겨 준다. 약속한다. 난 꽃다발이건 칼침이건 약속한 건 꼭 주는 사람인 거 알고 있지?”


테이블 밑. 박봉술의 발은 주민철의 다리 사이로 쇼핑백을 밀었다. “큰 애가 바이올린을 좀 한다며? 애 음악으로 대학 보내려면 돈 깨나 들 텐데. 2천이다. 자 이제. 형 질문에 대답할 시간이야. 블랙리스트 어디서 난 거야?”


얼굴이 파랗게 질린 공무원노조 위원장이 머뭇거리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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