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등잔 밑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13화
by rainon 김승진 Oct 12. 2021
테이블 밑. 박봉술의 발은 주민철의 다리 사이로 쇼핑백을 밀었다. “큰 애가 바이올린을 좀 한다며? 애 음악으로 대학 보내려면 돈 깨나 들 텐데. 2천이다. 자 이제. 형 질문에 대답할 시간이야. 블랙리스트 어디서 난 거야?”
얼굴이 파랗게 질린 공무원노조 위원장이 머뭇거리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사실...”
그 시각. 바 <쁘렘>은 원래 일요일 밤에 손님이 가장 적다. 홀 테이블 넷. 바 좌석 여섯. 텅 빈 조그만 가게 안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옥이 시계를 흘낏 보고서 적막을 깼다. “어제 그 두 진상 놈들 덕분에 오늘은 더 피곤하네. 그냥 일찍 마감하자.” 마무리 정리를 마친 안이지는 6월의 밤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거리로 나섰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다 만난 사거리 신호등 앞에 멈춘 이지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와 섰다.
“시험... 봤다면서?...... 잘 봤어?” 몇 달 만에 듣는 목소리였지만 이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쉬이 사라지지 않는 마음속 무거운 앙금이 커다란 추처럼 그녀의 목을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어 매고 있었다. 깊은 한 숨을 한 번 내쉬고서야 이지는 정면을 응시한 채로 마지못한 듯 대꾸했다. “시험 본 건 어떻게 알았어?” “그냥 어쩌다 보니 듣게 됐어. 잘 지내니?”
“잘 지내는지 궁금하긴 하나 보네? 그러는 아빤 잘 지내셔?” 잔뜩 메마른 목소리는 퉁명스러움을 머금고 있었다. 이지의 대답에 박힌 그 가시도 익숙한 듯, 안명훈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요새 일한다. 현병규 시장 캠프 선거 일 돕고 있어.”
이지가 대답하지 않자, 대화의 끈을 놓고 싶지 않은 안명훈이 서둘러 말을 이어갔다. “면접 준비도 잘하고... 끼니 거르지 말고...” 녹색 신호등이 켜지자 발을 떼던 이지가 고개를 돌려 아빠를 쳐다보았다. “다음 주, 엄마 기일인 건 알지? 추모공원... 난 오후에 갈 거야. 마주치고 싶지 않으니까 갈 거면 오전에 가.”
신호를 기다리며 핸들을 쥔 박봉술의 눈이 빛났다. 멈춰 선 차 앞으로 횡단보도 끝을 향해 걷는 이지를 알아본 박봉술이 중얼거렸다. “저 계집애가 문제인데... 휴대폰을 뺏을 방법이 없을까...” 24시간 전. 바 <쁘렘>에서 시청 감사담당관 강혁찬에게 무용담처럼 블랙리스트 건을 떠벌인 스스로가 다시금 한심해졌다. “일단 급한 불은 껐으니까... 설마 술집 꼬마애가 그 녹음 파일 가지고 뭘 어쩌지는 않겠지.” 신호가 바뀌자 박봉술은 액셀을 밟았다.
한산타임즈 사무실에 도착한 박봉술은 바로 컴퓨터를 켰다. 미리 작성해 둔 한산시청 공무원 노조 위원장 주민철 명의의 성명서 전문을 실은 기사를 마지막으로 검토한 박봉술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엔터 키를 탁 눌렀다.
“... 최근 시청 내에 떠도는 이른바 특정 후보 지지 여부에 관련된 살생부 문서는 그 진위 여부와 출처가 불명확한 괴문서로서 한산시청 공무원 노동조합은 그 실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한산시청 공무원들을 대표하는 노조는 헌법과 지방공무원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선거 중립을 엄정하게 준수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한산시청 공무원 노동조합 위원장 주민철”
담배를 비벼 끈 박봉술은 방금 전에 올린 기사 링크를 페이스북에 업로드하고 카카오톡 창을 열었다. 저장된 연락처 2천 개로 기사 링크를 전송한 한산타임즈 편집국장이 현병규 시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민철 매수 성공했어. 블랙리스트 건은 일단 덮었으니까 염려 마...... 그래. 그것도 알아냈어. 돈이 제일 세지. 순순히 불더라고...... 야! 임마. 문건 잘 관리하라고 내가 그렇게나 신신당부했는데! 그걸 어떻게 방치했던 거야? 등잔 밑을 제일 조심해야 하는 법이야! 빨대가 누구냐고? 니 바로 옆에 있는 그놈이다! 선거 사무장 안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