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6월의 애벌레 – 제24화
침묵을 사정없이 깬 것은 장세연 의원이었다. “윗사람한테 먼저 자기소개하고 인사하는 것 안 배웠어요?”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세연의 목소리에 가장 당황한 것은 기은석 의원이었다. “아니... 의원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여기 위아래가 어딨습니까? 다 같이 서로 도우면서 일하는 거죠.”
“아. 죄송합니다. 새로 발령받은 속기 9급 안이지 라고 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장세연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지가 또박또박, ‘속기 9급’ 네 글자를 스타카토로 탁탁 끊으며 힘주어 말하면서 크게 대답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두 여자는 서로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치 눈싸움을 벌이듯 둘은 서로의 시선을 먼저 피하지 않았다.
오른쪽 옆의 이지, 대각선 맞은편의 세연을 번갈아 보던 태연은 눈을 감았다. 6년 전, 그날 밤.
수능시험을 치른 다음날은 이지의 생일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토요일. 해방감은 과하지 않은 일탈을 합리화하기에 제법 유용한 장치였다. 개방적이고 쿨한 세연의 부모는 파티 장소로 집을 허락했다. 어차피 아예 못 마시게 막지도 못할 것. 아직 출입할 수도 없는 술집 앞에서 쭈뼛거리거나 어디 공원 구석에 숨어 추위에 떨며 마시느니 차라리 집에서 맘 편히 즐기라며 부부동반 1박 2일 산악회 모임을 떠났다. 다음날 아침을 위해 북어해장국을 끓여두고 주방 테이블에는 숙취 해소 음료까지 1박스를 올려둔 세연의 어머니는 딸에게 두 가지만을 당부했다. 안줏거리 든든하게 먹으면서 마셔. 밤에는 친구들 모두 다 집에 보내야 해. 딸 믿고 허락하는 거야. 응. 알겠어. 엄마, 고마워. 그렇게 영화 동아리 ‘은잔’ 멤버 일곱은 세연의 집에 한데 모였다.
음악과 수다 속에서 빈 술병 숫자가 늘어나는 속도는 빨라졌다. 아직 알코올의 뒤끝, 그 잔인한 역습을 미처 알기 전인 열아홉 살들은 취기가 주는 쾌감을 더 진하게 느끼려 잔을 연신 채우고 비웠다. “야! 우리 동아리 이름, 앞으로 은잔에서 술잔으로 바꾸자!” 누군가 던진 실없는 농담에도 모두들 까르르 즐겁기만 한 밤. 아홉 시가 지나자 동아리 멤버들은 하나둘씩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셋. 이지와 태연과 세연이 남았다.
“너희 둘... 나중에 결혼이라도 할 거야?” 술에 취해 잠이 든 이지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태연을 향해 잔뜩 꼬부라진 혀로 세연이 질문했다. “결혼? 무슨... 벌써 그런 걸 생각하냐?” 소파에 이지를 조심스럽게 눕히고 태연은 소파 아래로 내려와 앉아 술병을 들었다. “술 없네.” “있어봐. 가져올게.”
냉장고에 남은 술이 없는 것을 확인한 세연은 거실 진열장 안에 든 고급 위스키 한 병을 꺼내왔다. “이거... 마셔도 되는 거야?” “뭐. 어때? 아빠가 먹나, 내가 먹나. 누가 마시든 언젠가는 마실 건데.” 세연은 키득거리며 위스키 뚜껑을 돌렸다. 하지만 위조방지 라벨이 단단히 붙어 있는 병뚜껑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줘 봐. 내가 할게.” 태연이 양주병을 건네받는 순간, 이지의 전화기가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이지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응. 알았어. 지금 들어갈게.” 주섬주섬 외투를 걸치고 이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이 나가자. 데려다줄게.” 양주병을 내려놓고 태연도 일어났다. “아냐. 혼자 갈 수 있어. 좀 잤더니 술 다 깼다. 태연이 넌 여기 좀 치워주고 가. 세연아. 나 먼저 갈게. 오늘 재밌었다.”
까드득 소리를 내며 위스키 병이 열렸다. 소주 다음은 맥주. 그리고 양주. 태연과 세연은 위스키를 가득 채운 잔을 부딪쳤다. 아슬아슬 위태롭게 한 가닥 남은 이성의 실. 두 사람의 식도를 태우며 몸을 적시는 알싸하고 아찔한 위스키 향은 그 팽팽한 이성의 실을 끊어버리는 설익은 욕망의 칼날이 되었다.
지금도 알 수 없는 사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를 태연과 세연 둘 다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소파 위로 미끄러지듯 쓰러지며 거실 조명 스위치를 내린 것은 세연이었다. 커튼 사이로 들이치는 달빛이 이렇게 야한 색깔이었던가. 입술을 탐닉하던 혀를 세연의 목덜미 아래로 미끄러뜨리면서 잠깐 태연은 생각했다. 바들거리는 손으로 세연의 단추를 풀면서 태연은 또 생각했다. 이건 아닌데. 아니. 아닌 게 아닌데. 손보다 더 떨리는 심장의 쿵쾅거림은 내 가슴인가? 내 손에 담긴 세연의 가슴인가? 파르르 떨리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떨궈 내려 세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더욱 세게 태연을 끌어안았다. 불 꺼진 거실 안으로 좁은 커튼 틈을 비집고 달려드는 달빛이 더욱 진해지면서, 세연의 옷 안으로 파고드는 태연의 손가락도 과감해졌다. 진한 달빛이 벗은 세연의 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에 질세라 태연은 세연의 봉긋한 보름달에 맺힌 뜨거운 그 분홍을 살짝 깨물었다. 마지막을 벗길 때, 태연의 손은 더 이상 떨고 있지 않았다. 달빛을 머금은 태연과 세연은 그렇게 하나가 되었다. 태연도 세연도 처음이었다. 뜨거운 둘의 몸이 엉켜가며 마치 물속으로 잠기듯 서로에게 섞여가는 그때. 딸깍.
현관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