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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낚싯바늘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25화

by rainon 김승진

태연도 세연도 처음이었다. 뜨거운 둘의 몸이 엉켜가며 마치 물속으로 잠기듯 서로에게 섞여가는 그때. 딸깍. 현관문이 열렸다.


컴컴한 거실. 살짝 열린 커튼 틈으로 보름달 조각들이 부스스 떨어져 내리는 소파 위. 달빛만 걸친 채로 서로 끌어안아 포갠 둘. 현관에 서서 말없이 둘을 바라보는 하나. 거친 둘의 숨소리가 잦아들면서 공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땅 밑을 뚫고 저기 지구 안쪽 중심으로 꺼져가는 거실의 묵직한 공기 뭉치에서는 알코올과 땀 냄새만 났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멎어 세상이 끝나 버렸으면... 셋의 머릿속이 제각기 다른 색깔의 같은 소망으로 차오르며 시간이 멈춘 1분이... 지났다. 아까 세연의 집을 나서며 부츠를 신느라 현관 신발장 위에 올려놨던 자신의 핸드폰을 주머니에 담고서, 이지는 조용히 현관문을 닫고 나갔다.


몸을 떼고 일어나려는 태연의 허리를 세연이 힘껏 안았다. “이대로... 이대로 있어. 그냥.” 구름이 보름달을 덮으며 지나가나 보다. 그렇게나 눈부시도록 하얗던 달빛이 스르르 녹아 사라지고 있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세연은 태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널 먼저 안 것도 나고, 널 먼저 좋아한 것도 나야. 이제... 나를 봐.” 태연은 말이 없었다.


태연이 6년 전 11월의 그 밤을 떠올리는 사이, 기은석 의원은 두 여자 사이 싸늘한 분위기에 당혹해하고 있었다. 둘의 눈싸움을 끝낸 것은 세연이었다. “그래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시고.” 세연의 차가운 미소를 노려보는 이지의 뜨거운 눈에서 6년 전, 그 밤, 그 거실 소파를 비추던 달빛의 날카로운 칼날 조각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을, 태연은 알 수 있었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평의원 5명을 전담하는 비서였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장세연 의원님. 밖에 감사담당관님이 계속 기다리시는데. 혹시 지금 뵈실 수 있는지 물어보셔서...” “아, 제 방으로 갈게요.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세연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태연과 이지도 기은석 의원실을 나섰다. 감사팀장을 대동하고 문밖에 서있던 감사담당관 강혁찬이 이지를 마주치자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미소 띤 얼굴로 다소곳이 목례를 하며 이지는 생각했다. 네놈도 그날 박봉술이랑 가게에 같이 있었지? 그 블랙리스트 건을 박봉술이 너한테 자랑스레 떠벌였었지. 장세연 의원실로 들어가는 강혁찬 감사담당관의 뒤통수에 이지가 속으로 혼잣말을 뱉었다. 어디서 방탄조끼라도 하나 구해 놔라. 폭탄 터지면 옆에 있던 너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


점심식사를 마치고 구내식당 밖으로 걸어 나오면서 이지의 눈치를 살피던 태연이 말을 걸었다. “커피 한 잔 할래?” 세연과 눈싸움을 벌이다 6년 전 사건이 생생히 떠오르고 만 이지는 도로 태연에게 쌀쌀해졌다. “생각 없어. 혼자 드시든가.” “들려줄 게 하나 있어서 그래. 시간 좀 내줘.”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이지는 태연을 따라서 시청 앞 카페로 향했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시간도 물처럼 아래로 흐른다. 흘러내리는 시간이 쌓이면서 시간을 입에 문 기억도 무거워진다.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한 기억, 특히 나쁜 기억은 뇌 깊숙이 숨으며 기어들어간다. 그와 함께 엷어지는 아픔과 미움.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던져진 낚싯바늘이 머릿속을 헤집으며 잠자고 있던 그 기억 덩어리를 끌어올리면... 대롱대롱 기억을 건져내며 낚싯바늘은 또다시 머리 안에 생채기를 내고 만다. 그리고 그 상처는 다시 미움을 총에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다. 오늘 이지에 대한 세연의 도발은 낚싯바늘이었다. 이지와 태연과 세연. 세 사람 모두의 깊이에 숨어 있던 상처를 다시 긁어버린 낚싯바늘.


“할 얘기가 뭔데?”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고서 이지는 9월의 첫날 카페 창밖 풍경을 느끼고 있었다. 변화는 아름답다. 변하고 있는 그 순간은 참 예쁘다. 여름에게서 바통을 건네받은 가을이 대지를 박차며 그려내는 가을하고 가을한 거리 경치에 눈이 팔린 이지의 귀를 깨운 것은 태연의 핸드폰이었다. 이지의 아빠가 괴한들에게 습격당하던 그날 밤이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이 벌레 같은 새끼야! 은혜를 원수로 갚아? 너한테는 새꺄! 공기도 사치다! 배은망덕한 짐승 새끼는 숨 쉴 자격 없어!”


창밖 가을 풍경에 빠져 있던 이지의 고개가 확 돌아섰다. 태연의 핸드폰을 바라보는 이지의 눈에서 칼날 조각들이 또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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