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6월의 애벌레 – 제26화
여름에게서 바통을 건네받은 가을이 대지를 박차며 그려내는 가을하고 가을한 거리 경치에 눈이 팔린 이지의 귀를 깨운 것은 태연의 핸드폰이었다. 이지의 아빠가 괴한들에게 습격당하던 그날 밤이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창밖 가을 풍경에 빠져 있던 이지의 고개가 확 돌아섰다. 태연의 핸드폰을 바라보는 이지의 눈에서 칼날 조각들이 또 쏟아졌다.
“이 벌레 같은 새끼야! 은혜를 원수로 갚아? 너한테는 새꺄! 공기도 사치다! 배은망덕한 짐승 새끼는 숨 쉴 자격 없어!”
욕설의 주인공이 한산타임즈 사무실 문을 열며 큰소리로 인사했다. “큰형님! 식사하셨습니까!” 소파에 앉아 손톱을 깎고 있던 박봉술이 혀를 끌끌 찼다. “이 새끼야. 내가 무슨 조폭 두목이냐? 뭐? 식사하셨습니까? 에휴... 너는 식사 잘 쳐드셨냐?”
반소매 셔츠가 터질 듯 울퉁불퉁한 어깨. 그 아래 오른쪽 팔뚝 위로 혀를 날름거리는 뱀 세 마리가 뒤엉켜 있었다. 태연 핸드폰에 녹음된 욕설 주인공의 문신을 잠시 감상하던 박봉술이 테이블에 봉투 하나를 툭 던졌다. “너랑 니 똘마니들, 목욕비랑 해장국 값이나 해.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큰형님!”
“근데... 그게 그렇게 힘 조절이 안 돼? 내가 적당히 조물조물 빨래질만 하랬지, 아예 찢어놓으라고 했냐? 반신불수 벙어리 되게 생겼다. 내가 머리 아래로만 마사지하라고 했잖아!” “아휴. 큰형님도 참. 그게 생각대로 됩니까? 쳐 맞다 보면 꿈틀거리고 발버둥을 치는데... 저희가 치려고 친 게 아니죠. 그놈이 지 대가리를 가꾸목에 들이민 거죠.”
박봉술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당분간 싸돌아다니면서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운동이나 하고 있어. 장갑 끼고 각목 잡은 거 맞지? 안명훈이한테 침 뱉거나 하지 않았지?” “아. 그럼요. 염려 마시라니깐요. 머리카락 하나라도 떨어질까 봐서, 그 더위에 온몸 꽁꽁 싸매고 복면까지 했는데... ” 박봉술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이게 누구신가. 우리 장세연 의원님...... 그래 뭐 나야 그냥저냥 지내지. 응. 장 의원. 잠시만...” 박봉술이 뱀 문신을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그래 가 봐. 언제 소주 한 잔 사줄게.”
“오늘? 저녁? 아, 나야 우리 장 의원이 부르면 있던 약속도 깨야지, 당연히. 그래요... 그럼 이따 거기서 봅시다.”
박봉술과 통화를 마친 세연은 단골 한정식 식당 번호를 찾아 발신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장세연입니다. 오늘 저녁 7시. 수라 코스 셋 준비해 주세요.” 전화기를 닫고 기지개를 켜면서 세연은 의원실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9월 첫 오후 햇살에 샤워를 즐기고 있는 아름드리 나무. 그 그늘 아래 벤치. 고교 시절에 세연을 시녀 취급하다가 이제는 거꾸로 세연의 시녀 신세가 될 의회 속기사가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아빤 좀 어때? ...... 그래. 퇴근하고 바로 갈게...... 고마워 언니. 정말 고마워......” 은옥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을까... 이지는 새삼 절절한 감사를 느꼈다. 아무리 친자매 이상으로 가깝다고 해도, 어릴 적부터 은옥이 제 작은 아버지를 좋아하고 잘 따랐다고 해도, 출근하는 딸을 대신해서 이렇게 아빠의 병실을 지킨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사무실로 돌아오니, 중년의 한 여자가 이지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 전임자구나. “안녕하세요.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안이지 라고 합니다.” 김밥 가게를 인수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정년보다 5년이나 일찍 명예퇴직을 한다는 이지의 전임 속기사는 친절하고 자세하게 이지가 담당할 업무 전반을 설명해 주었다. 그녀의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으로 업무 인계인수 사항을 녹음하며 일을 배우고 나니, 어느새 오후 4시 30분. “식당 위치가 어딘가요? 조만간 한 번 꼭 갈게요.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출퇴근 시간을 안 지켜도 되는 자유를 향해 떠나는 전임자를 배웅하고 다시 자리에 돌아오자 모니터 하단 작업 표시줄 구석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사내 메신저였다. 누구지? 이지가 메신저 창을 열었다. 지난 6월, 바 <쁘렘>에서 박봉술과 함께 술떡이 되어서는 입에 담지도 못할 음담패설을 씨부렸던 진상, 공채 면접관이었던 사무관, 아까 기은석 의원실 앞에서 마주쳤던 감사담당관 강혁찬이었다.
‘안이지 주무관. 나 감사담당관인데. 충고 하나 하지. 상사한테 인사할 때 그렇게 실실 웃는 거 아니야. 좀 정!숙!한! 표정을 유지하도록!’
흠... 이지가 피식 웃었다. 6월 초, 그날, 바 <쁘렘>에서의 소동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풉. 이 아저씨야. 니가 지껄인 그 개소리. 그대로 내 폰에 들어 있단다.
“야! 오늘 밤 형님 모셔라. 이 분이 누구신지 알기나 해? 응? 영광인 줄 알아~ 마담 불러! 내가 호텔비랑 2차 떡값 계산할 테니까!”
사내 메신저 창 상단 도구 아이콘들을 죽 살펴보던 이지의 눈에, 전체 직원들을 메시지 수신 대상으로 만드는 체크박스가 보였다. 이지가 체크박스를 클릭했다.
‘강혁찬 감사담당관님. 상사에게 인사할 때 웃지 마라고 하신 그 가르침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 그런데 담당관님께서 지난번 저희 술집에 오셨을 때, 일행 분을 호텔로 모셔가서 성접대하라고 제게 종용하셨던 것 기억하시죠? 술집에서 일한다고서 함부로 막 대할 수 있다는 담당관님의 생각도 좀 정!숙!한! 방향으로 고치시면 어떨지 조심스레 조언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