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6월의 애벌레 – 제44화
“의석을 정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지방자치법」 제41조, 같은 법 시행령 제39조 및 「한산시의회 행정사무감사 및 조사에 관한 조례」의 규정에 따른 한산시 행정사무감사 실시를 선언합니다. 땅, 땅, 땅!” 국회 국정감사의 축소판. 시 집행부 직원들도, 의원들도, 의회 직원들도 1년 중 가장 신경이 곤두서는 시즌. 한산시 행정사무감사가 시작되었다.
이번 행정사무감사 특별위원회 의원장을 맡은 최석현은 평화당 소속 재선의원으로 한산시의회 부의장이기도 했다. 현병규 시장과 같은 새정치당 소속 의원은 한산시의회 의원 7명 중 단 2명, 장세연 의원과 윤기호 의원뿐. 무소속 의원 1명이 친 현병규 성향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현병규 시장과 대립각을 세우는 평화당 소속 의원 4명이 의장직과 부의장직을 차지하며 한산시의회 다수당 위치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방선거 후 첫 지역정치 이벤트인 이번 행정사무감사는 그래서 더욱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시작되었다.
“현병규 시장님을 비롯한 한산시청 공직자 여러분! 그리고 동료 위원 여러분! 아울러 우리 한산시의회에 많은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시는 한산시민 여러분과 언론인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행정사무감사는 한산시 행정사무 전반에 관한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행정의 잘못된 부분을 시정 요구함으로써 시민 삶의 질 향상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하는 것이 주된 목적인 만큼, 감사에 임하는 집행기관 관계 공무원 여러분은 본 행정사무감사가 소기의 목적을 거둘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행정사무감사 개시에 앞서 현병규 시장님의 인사 말씀과 집행기관 간부 소개가 있겠습니다.”
현병규 시장이 위원장 석 앞 발언대에 올랐다. “존경하는 최석현 행정사무감사 특별위원회 위원장님! 그리고 위원님 여러분! 시민 복리증진과 시정발전을 위해 헌신하시는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럼 간부 공무원을 소개하겠습니다......”
“현병규 시장님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은 감사 실시에 앞서 「한산시의회 행정사무감사 및 조사에 관한 조례」 제14조의 규정에 따라 증인선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서문은 시장님께서 대표로 낭독해 주시겠습니다.”
“선서! 본인은 한산시의회가 관계법령에 따라 실시하는 이번 행정사무감사에 임하며 성실하게......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서약하고 이에 선서합니다. 시장 현병규.”
“안내 말씀드립니다. 효율적인 감사 진행을 위해 잠시 감사를 중지한 후 부서별 감사 일정에 따라 오전 11시부터 도시건설국 행정사무감사를 실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 중지를 선포합니다.”
의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 후 다른 일정 참석을 이유로 현병규 시장은 본회의장을 떠났다. 졸리다. 커피 한 잔 마셔야지... 자리에서 일어나던 태연은, 의원석에서 나오려는 장세연 의원과 눈이 마주쳤다. 한쪽 눈을 찡긋하며 세연은 미소를 지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벗은 몸을 함께 섞었던 여인은 시의원. 나는 말단 주무관. 드라마 속 단골 클리셰인 남녀 간 신분 차이가 태연에게 새삼 묘하게 다가왔다. 살짝 세연에게 미소를 답례하며 태연은 두 눈을 찡긋 감았다 떴다.
본회의장 밖으로 나와 종이컵에 커피믹스를 뜯어 붓는 태연에게 의사팀장 지선아가 다가왔다. “태연 씨. 어제 밤늦게까지 안이지 씨 아버님 빈소에 있었다면서? 피곤하지 않아?” “괜찮습니다. 팀장님.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아냐. 내가 타 마실게.”
각자 커피 한 잔을 들고서 둘은 본회의장 밖 복도 구석 벤치에 앉았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게... 오늘까지는 전임자인 윤 계장님이 이지 씨를 대신해서 속기를 담당해 주시기로 했어요. 아침에 안이지 씨 전화가 왔는데... 내일 토요일 아침 발인 마치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는 출근하겠다고 하네. 부친상 특별휴가 기간은 주말 포함해서 1주일인데... 다음 주 수요일까지는 쉬어도 되는데... 아무리 말려도 굳이 월요일부터는 나오겠다고 고집이야... 김밥집 막 개업해서 정신없으신 윤 계장님 입장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고맙고 다행이긴 한데... 참... 원래는 자치행정국 자치행정과부터 감사를 시작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번에는 집행부 요청으로 감사 일정이 좀 변경되었어요. 오늘하고 다음 주 월요일까지 먼저 도시건설국을 감사하고, 화요일부터 자치행정국을 진행할 거니까, 그렇게 아시고...”
11시. 행정사무감사가 속개되었다. 감사 첫날이라서인지, 방청석에는 지방지와 지역신문 기자들이 자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미리 넉넉히 준비했다고 했는데도 감사 일정과 개요가 적힌 언론 배포용 유인물은 죄다 동이 나고 말았다. 추가로 몇 부 더 출력하기 위해 태연은 잠시 회의장을 나와 1층 사무실로 향했다.
“의석을 정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를 계속하겠습니다. 먼저 도시건설국 행정사무감사를 실시하겠습니다. 도시건설국장 나오셔서 도시건설국 주요 업무 추진현황을 보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방청석 맨 뒷자리에 앉은 박봉술의 전화기가 요란하게 노래했다. “아~아~아~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본회의장 모두가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 나는 곳을 노려보았지만, 박봉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 잠깐만. 끊지 말고 기다려. 나가서 받을게... 아 지금 회의 중이야. 기다려봐, 임마!” 좁은 방청석을 비집고 박봉술은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전화기 벨소리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한산타임즈 편집국장 박봉술임을 알게 된 대부분의 기자들은 알아서 무릎을 당기고 다리를 오므려서 길을 터주었다. 그런데 방청석 통로를 막고 쭉 뻗은 다리 둘은 움직임이 없었다. 하얀 백구두의 주인공은 길을 열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박봉술은 백구두를 노려보았다. 가가멜 같이 생긴 놈. 우리신문 정재호 국장이었다. 박봉술이 신경질적으로 정재호 기자의 다리를 발로 툭 치자, 가가멜은 그제야 박봉술의 인기척을 느낀 것처럼 짐짓 당황한 표정을 연출하며 슬며시 길을 내주었다. 정재호 개자식. 네놈 그 커다란 코를 내 언젠가는 뭉개 주마. 본회의장 밖으로 나가며 박봉술은 이를 갈았다.
“뭐? 없다고? 내가 어제 분명히 쇼핑백에다 같이 넣었는데?...... 다시 찾아봐, 이 새끼야.” “없다니깐, 아무리 찾아봐도. 니 놈 새끼가 의뢰인한테서 받은 3천만 원 중간에서 슬쩍하다가 같이 뺀 거 아냐? 조질 놈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일을 시작하냐? 사진이랑 그 뭐냐, 주소랑 자료 다시 보내줘. 사진 찍어서 보내 그냥.” “에잇. 분명 거기 넣었는데... 핸드폰으로는 절대 안 돼! 이따 어젯밤 거기서 다시 만나.” “귀찮게 사람 또 오라 가라 지랄이냐? 니가 빠뜨려 놓고는, 에이. 오늘 중에 빨리 해치우려고 했구만. 누군진 몰라도 그놈은 수명이 하루 연장된 거네, 뭐. 그럼 이따가 전화해!”
통화를 끝내고 다시 본회의장 쪽으로 걸어가던 박봉술은 손에 서류 뭉치를 든 젊은 남직원과 마주쳤다. “어이! 자네 의회 직원인가? 처음 보는데.” “아... 네. 안녕하세요. 주무관 유태연이라고 합니다.” “유태연? 아~ 그 장세연 의원과 동창이라는... 맞지? 자네 가윤고 나왔지?” “아... 네... 그렇습니다.” “너 의회 오기 전에 어디서 근무했어?” “사회복지과에서 장애인복지 업무 담당했습니다.” “야 임마! 어른을 보면 인사부터 해야지! 너, 나 몰라?” “기자 분이시지요?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함자를 잘 몰라서...” “거 참, 장세연이는... 내 이름도 모르는 놈을 승진시켜달라고 하는 거여? 에휴. 자! 명함 받아! 앞으로는 보면 바로 인사해!”
본회의장 문을 쾅 닫으며 들어가는 박봉술의 뒤통수를 한동안 노려보다, 태연은 명함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한산타임즈 편집국장. 박봉술.> 바로 어제, 장례식장 화장실에서 들었던 그놈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아니, 그러니깐... 여보세요. 형! 큰 형님!! 박, 봉 자, 술 자! 우리 큰형니임~!!! 제 말씀 좀 들어보시라고요!!! 전화 끊지 마요! 끊지 마! 분명히 말했어! 전화 끊으면 나 바로 경찰서 갈 거야. 다 불어버릴 거야! 뭐? 잘 안 들렸어. 다시 말해 봐요!”
“이것 봐요. 봉술이 형!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만 했어. 그런데 이게 뭐야? 사람이 죽어버렸잖아! 난 이렇게까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엉? ...... 형님 덕분에 내가 살인자가 됐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