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6월의 애벌레 – 제45화
“야 임마! 어른을 보면 인사부터 해야지! 너, 나 몰라?” “기자 분이시지요?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함자를 잘 몰라서...” “거 참, 장세연이는... 내 이름도 모르는 놈을 승진시켜달라고 하는 거여? 에휴. 자! 명함 받아! 앞으로는 보면 바로 인사해!”
본회의장 문을 쾅 닫으며 들어가는 박봉술의 뒤통수를 한동안 노려보다, 태연은 명함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한산타임즈 편집국장. 박봉술.> 바로 어제, 장례식장 화장실에서 들었던 그놈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아니, 그러니깐... 여보세요. 형! 큰 형님!! 박, 봉 자, 술 자! 우리 큰형니임~!!! 제 말씀 좀 들어보시라고요!!! 전화 끊지 마요! 끊지 마! 분명히 말했어! 전화 끊으면 나 바로 경찰서 갈 거야. 다 불어버릴 거야! 뭐? 잘 안 들렸어. 다시 말해 봐요!”
“이것 봐요. 봉술이 형!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만 했어. 그런데 이게 뭐야? 사람이 죽어버렸잖아! 난 이렇게까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엉? ...... 형님 덕분에 내가 살인자가 됐다고요!!!”
박봉술... 흔한 이름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지역신문이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기자라는 인간이 사람을 죽도록 두들겨 팬 폭행치사 사건의 교사범일까? 안명훈 각목 구타사건의 무자비한 현장을 직접 목격은 했지만, 박봉술의 잔인함도 선거 직전 블랙리스트 소동과 폭행사건과의 연관성도 아직 모르는 태연으로서는 헷갈렸다. 함부로 말 툭툭 뱉는 본새를 보아하니 건달 사촌 같아 보이기는 한데...
11시 50분. 오전 감사 일정이 종료되자, 7명 한산시의회 의원들은 의회 청사 앞 미니버스에 올랐다. 점심식사 장소로 의원들을 모시는 미니버스가 출발하자 직원들도 각자 식사를 위해 흩어졌다. 태연은 지선아 팀장과 함께 구내식당으로 들어갔다. 오늘의 메뉴 – 기장밥, 북엇국, 제육볶음, 연근조림...
북엇국 한 숟갈을 입에 떠 넣다가, 태연은 전날 아침 세연이 손수 끓여 주었던 깜짝 놀랄 맛의 북엇국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꼬리를 물며 떠오른 건... 오전 본회의장에서 태연을 향해 짓던 장세연 의원의 미소... 그리고... 그저께와 어저께 세연과의 뜨겁던 밤. 이지야... 나는 이제 다시는 너에게 돌아갈 수가 없게 된 거니? 오늘도 빈소를 지키고 있을 이지를 잠깐 생각하다가, 돌아가신 이지의 아빠를 생각하다가... 맞다! 불현듯, 태연은 맞은편에 앉아 젓가락질에 열중인 지선아 팀장에게 물었다.
“팀장님. 박봉술 기자라고... 혹시 아세요? 어떤 사람이죠?” “박봉술 국장? 아... 태연 씨는 아직 그분 잘 모르나 보구나. 하긴 입사한 지 얼마 안 되는 직원들은 많이들 잘 모를 거야. 그분. 근데 왜?” “아뇨. 아까 본회의장 앞에서 마주쳤는데... 그냥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요.” “...... 음... 밥 다 먹고 얘기해도 될까?” 지선아 의사팀장은 즉답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
어제 하루 세찬 빗방울로 흠뻑 샤워를 즐기고 난 하늘. 초가을의 하늘은 그 빛깔 하나만으로 대지에 붙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가슴속에 행복감과 감사함을 차오르게 하는 것 같았다. 의회 청사 앞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벤치에 지선아와 유태연이 나란히 앉았다.
“한 마디로... 보이지 않는 한산시장? 뭐 그렇게 불리는 사람이야. 현병규 시장은 무늬만 시장일 뿐, 단지 박봉술의 아바타?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 지금 현병규 시장만이 아니라, 그 전, 전전 시장들도 박봉술이 다 당선시켜서 조종했다는 얘기도 있고. 박봉술은 젊었을 때 조직 폭력배 두목이었대. 근데 깡패 치고는 꽤 똑똑하고 그래서 대학까지 나왔다고 하고... 한산타임즈 신문사 대표 겸 편집국장 명함 파서 다니는데... 실제로는 여기저기 이권 개입하고, 손을 뻗치지 않은 사업이 없다고 해. 그래서인지? 엄청난 부자라고 하더라. 직원들도... 그 사람을 두려워해. 간부 공무원들조차도 현병규 말은 거역해도 박봉술 말에는 고분고분한다고 할 정도니까... 원래 지방 소도시 지역사회가 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유난히도 우리 한산시에서 박봉술의 존재감? 무게감은 커. 근데...” 잠시 말을 멈춘 지선아 팀장이 고개를 돌려 태연의 눈을 바라보았다.
“난 누구 뒷말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지만, 거짓말하는 건 더 싫거든. 태연 씨가 궁금해하니까 있는 그대로 말해주는 거지만... 그냥 듣고 혼자 알고만 있으면 좋겠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악당이야. 악당..... 한산시청 공무원 밥을 계속 먹으려면 그 사람 눈 밖에 나지 않는 것이 좋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가까이 지내지는 마. 좋은 사람은 절대로 아니니까. 그래도 뭐... 승진 빨리 하고 싶다면 친해지는 게 좋긴 할 거야. 그건 뭐, 태연 씨 선택이야. 난 그분이랑 친하지 않아서 이 모양이지만... 후훗. 아! 하나 더. 박봉술 국장 별명이 뭔지 알아? 아무개야 아무개. 아! 무섭고 더러운 개새끼! 웃기지?”
오후 행정사무감사. 현병규 시장과 반대당인 평화당 소속 의원들의 맵고 거친 질문 공세가 계속됐다. 9급 공채 출신 지방공무원의 꽃이라는 사무관 감투는 공짜가 아닌 법. 도시건설국 소속 과장들은 진땀을 흘리며 시장을 대신해 연신 집중포화를 얻어맞았다. 행감 특위 위원들의 고성과 호통을 당하면서 치미는 울화를 안으로 삼키는 속내들이, 지그시 안으로 깨문 과장들의 입술 위로 역력했다. 시의원 장세연은 별 말이 없었다. 현병규 시장과 같은 당이라서 인가? 하긴... 태연이 보기에도, 바로 어제 이지 아버지의 빈소에서 장세연 의원은 현병규 시장과 술잔을 부딪치며 부쩍 더 친해진 것 같았다.
“잠시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원활한 감사를 위하여 감사중지를 한 후, 15시부터 도시건설국 건축과 행정사무감사를 속개하겠습니다. 감사중지를 선포합니다.”
4층 의회 도서관은 불이 꺼져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태연은 전화기를 꺼냈다. “무슨 일이야? 지금 회의 중 아냐?” “아. 이지야. 중요한 할 얘기가 있어. 그냥 듣기만 해. 폭행사건 현장에서, 그리고 어제 내가 장례식장 화장실에서 녹음한 그 범인 목소리 있잖아. 거기 나오는 박봉술이라는 이름 있지? 그거 한산타임즈 신문사 기자인 것 같아. 그놈이 배후가 분명한...” “알아.” “... 응?” “알고 있다구. 그거 말하려고 전화한 거야?” “아... 응. 그래. 근데 알고 있었어?” 놀라기는커녕 시큰둥한 이지의 목소리에 태연은 민망할 지경이었다. “알고 있다구.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 녹음 파일들 그냥 지우고, 넌 신경 꺼. 말했지만, 경찰에 신고할 생각은 말고.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끊어. 나 바빠.”
태연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이지에게 화를 낼 상황이 전혀 아님을 알면서도 괜히 화가 났다. 기껏 알아낸 정보를 전해주려고 핸드폰을 열며 두근거리던 심장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양 볼을 때리는 느낌이었다. 입사 3년 차인 내가 오늘에야 알게 된 인물을, 단 3일 출근한 네가 알고 있다고? 뭐... 그럴 수도 있겠다만... 무안함이란 그런 것이다. 당혹스럽고 겸연쩍은 기분은 아무도 없는 방에서도 고개를 들기 어렵게 만들었다.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지, 뭐. 태연은 의회 도서관 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방 문 밖에는 아무도 없지 않았다.
아! 무섭고 더러운 개새끼! 아무개. 박봉술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