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있는 퍼즐 조각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46화

by rainon 김승진

태연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이지에게 화를 낼 상황이 전혀 아님을 알면서도 괜히 화가 났다. 기껏 알아낸 정보를 전해주려고 핸드폰을 열며 두근거리던 심장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양 볼을 때리는 느낌이었다. 입사 3년 차인 내가 오늘에야 알게 된 인물을, 단 3일 출근한 네가 알고 있다고? 뭐... 그럴 수도 있겠다만... 무안함이란 그런 것이다. 당혹스럽고 겸연쩍은 기분은 아무도 없는 방에서도 고개를 들기 어렵게 만들었다.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지, 뭐. 태연은 의회 도서관 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방 문 밖에는 아무도 없지 않았다.


아! 무섭고 더러운 개새끼! 아무개. 박봉술이 서 있었다. 얼음! 뜨겁게 달아오르던 태연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지면서, 멈칫, 몸도 얼음이 되었다.


“깜짝이야! 불도 안 켜고 그 안에서 뭐 한 거야?” “아... 저... 그게... 뭐 좀 찾아보느라고...” “뭘 찾는다면서 불도 안 켜? 허... 그놈 참.” “국장님은 여기에 어쩐 일로?” “얌마! 나 의회 출입기자야! 잠깐 좀 쉬러 왔다, 왜? 볼 일 다 봤으면 나가.” “네. 박봉술 국장님.”


“그새 이름은 외웠나 보네.” 계단을 내려가는 태연의 뒤통수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은 박봉술이 의회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나야. 이따 밤 10시에, 어제 거기 낚시터에서 봐...... 아, 글쎄. 핸드폰으로 보내는 건 위험하대두! 직접 줄 테니깐, 좀 기어 나오셔! 한 큐에 칠천만 원 버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았어? 끊어!” 통화를 마친 박봉술은 도서관 구석에 놓인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몸은 극도로 피곤했지만, 정신은 정반대로 또렷했다. 시작은 석 달 전. 시장 경쟁 후보인 손철기 쪽에 줄을 선 팀장급 이상 공무원들 명단을 박봉술이 직접 작성했던 선거일 열흘 전의 밤. 살생부 문건을 현병규 시장에게 건넸던 그다음 날 오후. 그 이후의 상황들을 차근차근 복기했다.


멍청한 놈 현병규가 흘린 그 블랙리스트 문건을 선거사무장 안명훈이 주워다가 공무원노조에 전달. 노조로부터 문건을 입수한 우리신문 가가멜 자식이 살생부 기사를 선거 3일 전에 보도. 박봉술이 노조위원장 주민철을 협박·매수. 문건을 출처 불명 괴문서로 단정한 노조위원장 명의 반박기사를 박봉술이 보도. 생선 훔쳐간 고양이는 혼이 좀 나야지? 박봉술의 건달 동생 셋이서 안명훈을 각목으로 구타. 입원 중이던 안명훈 사망. 안명훈이 죽어버리자 1억을 요구하며 박봉술을 협박해 오는 폭행범 중 한 놈이 믿었던 동생 김정태라니... 김정태. 김정태는 내일 중에는 불귀의 객으로 저승행 버스를 타기로 되어 있고... 그놈은 이제 영원히 말을 못 하게 될 테니, 문제없다. 그런데...


그 안명훈의 딸 안이지. 이번 공채 시험에 합격해서 한산시의회 속기사로 들어온 안이지. 선거 나흘 전, 시청 감사담당관 강혁찬과 들렀던 바 <쁘렘>의 바텐더였던 안이지. 제기랄... 만취된 상태에서, 안이지 앞에서, 그놈의 블랙리스트 건을 자랑처럼 떠벌였던... 제 발등을 도끼로 찍고 싶은 치명적인 실수. 그걸 전부 녹음한 안이지. 안이지. not easy. 쉽지 않게 되어버린 이 상황. 안이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바 <쁘렘>에서 강혁찬과 나눈 대화는 아직도 안이지의 핸드폰 속에 살아 있을까? 안이지의 핸드폰만 없어진다면 모든 게 해결될까? 하지만, 그 맹랑한 바텐더인지 속기사인지 계집아이가 녹취 파일을 다른 곳에 백업이라도 해 두었다면? 핸드폰을 훔쳐 부순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 제길. 안이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아직은 블랙리스트 문건 파동과 제 아비의 죽음 사이 연결 관계를 모르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안이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완전범죄의 퍼즐 조각 하나가 비어 있었다.


비어있는 퍼즐 조각 하나를 쫓으며 꼬리를 무는 생각의 고리 끝으로 졸음이 쏟아졌다. 박봉술이 의회 도서관 소파 위 잠깐의 낮잠에 빠져드는 그때.


시내 한 카페 문을 열고 한산경찰서 경비계장 곽희율 경위가 들어서자, 카페 구석에 앉아 있던 가가멜이 오른손을 들었다. “여기야. 여기.” 곽희율 경위가 우리신문 정재호 국장 앞에 마주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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