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발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47화

by rainon 김승진

박봉술이 의회 도서관 소파 위 잠깐의 낮잠에 빠져드는 그때. 시내 한 카페 문을 열고 한산경찰서 경비계장 곽희율 경위가 들어서자, 카페 구석에 앉아 있던 가가멜이 오른손을 들었다. “여기야. 여기.” 곽희율 경위가 우리신문 정재호 국장 앞에 마주 앉았다.


“좀 알아봤어?” 정재호 기자의 질문에 곽희율 경비계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잖아. 경찰이라는 조직, 부서 사이 칸막이가 높은 거. 너도 잘 알잖아? 수사 진행 상황, 경비계까지는 소문 오지도 않는다.” 예상했던 대답이라는 표정으로 정재호 기자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근데 또 내가 누구냐? 강력팀 칸막이 틈으로 빨대 하나 꽂을 힘은 되잖냐?” 정재호의 눈이 커졌다. “뭐, 좀 소득이 있어?” “근데, 네가 기대하는 답은 아니다. 단서가 될 만한 게 하나도 없어. 안명훈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더 그렇게 됐다. 현장에 있었던 유태연이라는 목격자 진술만으로는 용의자 특정도 안 돼. 거긴 CCTV도 없고, 현장에 버리고 간 각목에서도 지문 한 개 안 나오고, 수사를 진전시킬 동력이 전혀 없댄다. 아마 이대로 종결되지 싶어.”


“하지만 정황상 박봉술이 사주했을 가능성이 그래도 있는...” 정재호 국장의 말을 경비계장이 잘랐다. “재호야. 그 살생부, 선거 전에 나돌았던 블랙리스트 건이랑 안명훈 폭행치사 사건의 연결 고리. 네 말은 그럴싸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나도 박봉술 그 자식 치가 떨리게 싫다. 정말이지 그 뱀 같은 새끼, 한 번 잡아 처넣는 게 나도 소원이다. 근데 증거가 하나도 없잖아, 증거가. 막연한 의심만 가지고는 수사 진행 못해. 그 블랙리스트라는 것을 현병규 시장이나 최측근인 박봉술이 만들었다는 것부터가 그냥 의심일 뿐이잖아. 니 기사에서 문건을 입수했다고 했던 시청 노조에서도 공식적으로 그 존재를 부인했고. 블랙리스트로 피해를 볼 공무원들 노조가 아니라고 하는데, 뭘 어떻게 더 해보겠어? 백번 양보해서 말이야, 박봉술이 블랙리스트를 작성했고, 안명훈이 그걸 노조에 갖다 주고, 그래서 앙심을 품은 박봉술이 지 졸개들 시켜서 안명훈을 그렇게 만들었다 치자. 근데 증거가 하나도 없잖아, 하나도.”


“그래서... 이대로 그냥 덮고 마는 거야? 사람이 맞아 죽었는데도?” 정재호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너도 잘 알잖아. 박봉술이라는 놈. 수십 년 동안 여기저기, 특히 경찰에다가 약 치고 다녔던 것. 그거 약발 생각보다 세다. 순경 때부터 박봉술한테 밥 얻어 처먹고, 술 얻어 처마시고, 봉투 받아서 그걸로 애들 학원비 했던 놈들. 그놈들이 죄다 경찰서 요직을 꿰차고 있는데, 정황상 의심이 간다는 이유만으로 걔들이 박봉술 수사할 것 같아? 나도 속에서 천불이 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검찰에서 사건을 들여다본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거야. 재호 네 심정은 백번 이해한다만... 그냥 너도 이쯤에서 포기해라.”


단잠에 빠졌던 박봉술이 깨어났다. 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의회 도서관 문을 열고 나온 박봉술은 계단을 내려가 본회의장으로 들어갔다. 오후 5시 20분. 행정사무감사 첫날 감사 일정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더 질의하실 위원 계십니까?” “없습니다.” “더 질의하실 위원이 안 계시므로 도시건설국 교통행정과에 대한 행정사무감사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랜 시간 진지한 자세로 감사에 임해 주신 위원님들과 공무원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9월 8일 월요일 오전 10시에 도시건설국 도로행정과부터 행정사무감사를 계속 실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중지를 선언합니다.”


본회의장을 정리하고 태연은 사무실로 내려왔다. 전화기가 진동했다. “저녁 먹자. 새로 생긴 돼지갈빗집인데, 아주 맛있다네.” 장세연 의원의 문자 메시지였다. “안 돼. 오늘은 야근해야 할 것 같아.” “금요일 밤에 무슨 야근이야? 그냥 내일 해.” “내일은 이지 아버님 발인 운구 도와야 해.” “......” “내일 발인 마치고 봐. 내가 연락할게.” “꼭 네가 발인까지 같이 해야만 해?” 세연의 문자 메시지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세연아. 이지... 그래도 고등학교 동창이야. 내 바로 옆자리 동료 직원이기도 하고.”


탁! 신경질적으로 책상에 전화기를 내려놓고서 장세연 의원은 의원실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같은 당 소속 시장에 대한 공격은 자제하기로 방침을 정했기에 행감장에서 질의는 거의 하지 않았지만,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태연이 너랑 저녁 먹으려고 맛집 예약까지 해뒀는데! 내일 해도 될 잔업을 이지 부친상 발인 운구 때문에 굳이 오늘 하겠다는 태연에게 짜증이 확 치밀었다. 저녁 예약 취소를 위해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데,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진동해댔다. 같은 당인 새정치당 소속 한산시 국회의원 양지헌의 보좌관이었다.


“장세연 의원님. 행감 첫날인데, 고생하셨습니다. 중간에 인터넷 중계로 잠깐 봤는데, 평화당 의원들 아주 그냥 우리 현 시장님 물어뜯으려고 난리 더만요. 좀 말이 되는 걸로 공격을 해야지, 원. 아 그건 그렇고. 장 의원님. 혹시 내일 낮에 시간 좀 되시나요?”


“내일 낮이요? 특별한 일정은 없어요. 사무실 나와서 감사 자료집이나 좀 볼까 해요.” “아, 그럼 마침 잘됐네요. 다름이 아니고, 사실... 국회의원님 어머님께서 얼마 전부터 요 인근 교외에 텃밭을 장만해서 소일거리로 농사를 시작하셨거든요. 이번 주말에 날씨도 참 좋다고 하는데, 우리 장 의원님도 운동 삼아, 구경삼아 한 번 오시죠! 마침 내일 김장무랑 배추 씨를 뿌리신다고 해서요. 편안한 복장으로, 좀 버려도 되는 옷으로 입고 오세요. 위치는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내일 양지헌 의원님도 직접 오실 겁니다.”


보좌관 놈은 제 할 말만 다하고는 전화를 일방적으로 툭 끊었다. 세연의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하다 하다 이제는 지 엄마 농사일에까지 동원을 해? 시의원이 무슨 국회의원 노비야? 울화가 치밀었지만,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 그랬다. 시의원 딱 한 번만 하고 말 거라면 지역구 국회의원 앞에서 용감할 수 있다고. 하지만 세연은 시의원을 한 번만 할 생각이 없었다. 시의원에 당선된 직후, 양지헌 국회의원의 그 건방진 보좌관 놈이 세연에게 조언이랍시고 한 말이 떠올랐다.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기 위해서 제일 필요한 게 뭔 줄 아시나요? 비료? 햇빛, 물? 아닙니다. 바로 농약이에요. 농약. 앞으로 장 의원님 앞에 계속 나타날 경쟁자들, 잡초와 잡 벌레들을 싹 없애려면 부지런히 약을 치셔야 합니다. 약발은 정직해요. 열심히 뿌린 만큼 나무는 무럭무럭 자랄 겁니다.” 투덜거리면서 세연은 보좌관이 보내온 주소 문자를 열었다.


한산병원 장례식장 1층 특실. 고 안명훈의 빈소를 찾아오는 조문객은 확실히 전날보다는 많이 줄었다. 그래도 아버지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러 간간이 들어오는 문상객들을 맞으며 이지는 장례 이틀째를 보내고 있었다. 조문객의 발길이 거의 끊긴 밤 10시.


익숙한 커다란 코가 빈소에 들어섰다. 보면 볼수록 가가멜이랑 참 닮았단 말이지. 우리신문 정재호 국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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