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 숯불갈비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48화

by rainon 김승진

조문객의 발길이 거의 끊긴 밤 10시. 익숙한 커다란 코가 빈소에 들어섰다. 보면 볼수록 가가멜이랑 참 닮았단 말이지. 우리신문 정재호 국장이었다.


“어서 오세요.” “너무 늦어서, 미안합니다. 낮에는 조문객들도, 보는 눈들도 많을 것 같아서... 일부러 이 시간에 왔습니다.” “앉으세요. 차 한 잔 드릴까요?” “네. 녹차.” 이지는 빈소 구석 주방으로 들어갔다.


같은 시각. 밤 10시. 교외 낚시터 주차장. 포터 트럭 조수석 문을 열고 박봉술이 서류 봉투를 툭 던졌다. “이름은 김정태. 사진이랑, 주소, 단골 술집 위치, 거기 다 들어있어. 되도록 빨리 삭제해. 시체 안 남게.” 운전석의 남자는 봉투 속 사진을 꺼내 잠깐 들여다보고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시동을 걸었다.


한산시 시내. 귀가를 위해 사거리 직진 신호를 기다리던 박봉술은 뭔가 생각난 듯, 핸들을 왼쪽으로 확 꺾었다. 유턴한 박봉술의 차는 한산병원을 향했다. 밤 10시 42분. 내일이 발인이랬지, 아마? 명훈이 딸이 아직 빈소에 있을 거야. 그년 눈을 좀 봐야겠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혹시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


1층 특실 입구. 안쪽 구석 어디선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장례식장 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아무도 없나? 빈소로 들어가기 위해 신발을 벗던 박봉술은 누군가 입구에 벗어둔 신발에 발이 걸렸다. 기우뚱거리는 뚱뚱한 몸뚱이의 균형을 가까스로 잡으면서 박봉술은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남자 구두였다. 하얀 구두였다. 백구두.


백구두? 어디선가 본 구두인데? 내가 어디서 봤더라? 백구두를 노려보는 박봉술의 눈빛이 하얀 구두 표면에 반사되어 다시 머릿속으로 들어가 기억을 헤집었다. 숨어있던 기억 한 조각을 찾아 꺼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까 오전, 한산시의회 본회의장.


방청석 맨 뒷자리에 앉은 박봉술의 전화기가 요란하게 노래했다. “아~아~아~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본회의장 모두가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 나는 곳을 노려보았지만, 박봉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 잠깐만. 끊지 말고 기다려. 나가서 받을게... 아 지금 회의 중이야. 기다려봐, 임마!” 좁은 방청석을 비집고 박봉술은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전화기 벨소리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한산타임즈 편집국장 박봉술 임을 알게 된 대부분의 기자들은 알아서 무릎을 당기고 다리를 오므려서 길을 터주었다. 그런데 방청석 통로를 막고 쭉 뻗은 다리 둘은 움직임이 없었다. 하얀 백구두의 주인공은 길을 열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박봉술은 백구두를 노려보았다. 가가멜 같이 생긴 놈. 우리신문 정재호 국장이었다. 박봉술이 신경질적으로 정재호 기자의 다리를 발로 툭 치자, 가가멜은 그제야 박봉술의 인기척을 느낀 것처럼 짐짓 당황한 표정을 연출하며 슬며시 길을 내주었다.


벗으려던 신발에 도로 발을 구겨 넣고 박봉술은 슬그머니 장례식장 건물을 빠져나왔다. 안명훈 딸의 눈은 더 볼 필요도 없다. 블랙리스트 건과 안명훈의 죽음을 잇는 똑딱이 단추. 이제 안이지 앞에서 딸깍 채워졌다. 하지만 크게 염려할 필요도 없다. 그 똑딱이 단추를 누가 설계했는지 의심은 가겠지. 그래도 어차피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김정태는 오늘내일 중에 증발할 거니깐. 그런데 안명훈을 각목으로 찜질한 나머지 두 놈은? 둘이 합쳐서 전과가 20범. 이번에 들어가면 감옥에서 인생 끝날 놈들. 명훈이가 죽어 나간 마당에 자수할 바보들은 아니다. 김정태가 소리 없이 사라진 걸 곧 알게 되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챌 아이큐 정도는 되는 놈들이니, 걱정 안 해도 된다. 자수 운운하면서 감히 돈을 뜯어내려 덤빈 정태 놈만 없어지면 문제없다. 괜찮아. 봉술아. 지금까지 잘해 왔잖아. 괜찮아. 괜찮아. 박봉술은 핸들을 쥔 손바닥에 난 땀을 바지춤에 닦았다.


밤 11시 15분. 긴 시간 대화가 끝나자 가가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댁으로 가실 거죠? 저 차 가져왔는데, 모셔 드릴게요.”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좀... 생각할 것도 있고... 혼자 가는 게 편해요.” “내일 발인은 몇 시죠?” “10시예요.” “아버지, 마지막 가시는 길... 잘 보살펴 드리시고... 이지 씨도 어서 기운 차리시길 바랍니다. 그럼 연락 주세요.” “안녕히 가세요.”


병원 정문을 나온 이지는 택시를 부를까 잠깐 고민하다 그냥 천천히 걷기로 했다. 초가을 밤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이지는 방금 전 정재호 기자와 나눈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이제, 언제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으로 머리는 어지러웠지만, 마음은 평온했다. 지친 몸을 이끄는 발걸음 끝으로 어둠을 툭툭 차 내면서 이지는 집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아파트 단지로 향하는 길은 두 개였다. 한밤중에도 가로등이 훤한 대로변 대신 이지는 후미진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막상 걷다 보니, 발목에 묶여 매달린 피곤함은 투포환 경기용 쇠공처럼 무거웠다. 좀 빠르게 갈 수 있는 대신에 살짝 무섭도록 어두침침한 빈집촌을 가로질러 이지는 부지런히 걸었다. 다리 아파... 그냥 택시를 탈 걸... 극도의 피로감 위로 쌓이는 짜증에는 졸음도 섞여 밀려왔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거리. 기울어진 채로 매달린 부서진 간판에 써진 글씨 <동아 숯불갈비> 아... 아주 아주 한참 전에 초등학교 때, 아빠가 가끔 고기를 사주던 거기네? 잠시 발길을 멈춘 이지는, 오래전에 문을 닫은, 지금은 폐가로 남은 고깃집 간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툭. 아버지가 죽고 난 이후, 꼭 두 번째 눈물방울이 발끝으로 떨어졌다. 눈가에 돋아나려는 세 번째 방울을 소매로 훔쳐내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려는데... 아악!


비명이다. 여자 목소리다. <동아 숯불갈비> 건물 안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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