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침(時針)이 된 초침(秒針)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49화
by rainon 김승진 Feb 24. 2022
아무도 없는 어두운 거리. 기울어진 채로 매달린 부서진 간판에 써진 글씨 <동아 숯불갈비> 아... 아주 아주 한참 전에 초등학교 때, 아빠가 가끔 고기를 사주던 거기네? 잠시 발길을 멈춘 이지는, 오래전에 문을 닫은, 지금은 폐가로 남은 고깃집 간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툭. 아버지가 죽고 난 이후, 꼭 두 번째 눈물방울이 발끝으로 떨어졌다. 눈가에 돋아나려는 세 번째 방울을 소매로 훔쳐내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려는데... 아악!
비명이다. 여자 목소리다. <동아 숯불갈비> 건물 안쪽이다.
숯불갈비집이었던 폐건물 입구 출입문은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반사적으로 비명 소리가 난 건물 안으로 급히 들어가던 이지의 몸이 멈칫 굳어졌다. 뭔가 아주 안 좋은 일을 어느 여자가 당하고 있는 게 분명함을 직감하면서 이지는 무서웠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나,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나, 어째야 하나,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그때. 외마디 비명이 건물 안 구석에서 다시 터져 나왔다.
“악! 살려 주세요. 이러지 마세... 읍!” 누군가가 여자의 입을 틀어막은 것 같았다. “그냥 가만히 있어. 죽기 싫으면!” 낮고 무거운 남자의 목소리는 소름 끼치게 잔인했다. 강간이다. 성폭행.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는 칠흑 속 몇 미터 앞의 상황을 이지는 알 수 있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마음은 급하게 동동거렸지만, 이지의 몸은 계속 굳은 채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여자를 제압하려는 남자의 몸짓과 그에 저항하는 여자의 몸부림. 투닥거리고 쿵쾅거리는 격렬한 몸싸움 소리 꼬리를 잡고, 좌악, 아마도 여자의 옷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지는 다급히 건물 밖으로 나갔다. 112! 전화부터! 어서! 그런데!
어? 핸드폰이 없다. 아! 장례식장에 두고 왔나? 왜? 없지? 분명 챙긴다고 챙긴 것 같은데.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그때, 빈집촌 거리 저 끝 저편으로 누군가 어둠 속에 터덜터덜 걸어오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분명 사람이었다. 분명 남자였다. 어둠에 익숙해진 이지의 눈에 엄청난 덩치의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하지만.
남자의 걸음은 느렸다. 한잔 걸치기라도 한 건지, 남자는 살짝 비틀거리면서 느릿느릿 숯불갈비집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요! 빨리요! 좀 도와주세요!!!” 이지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런데.
입과 혀가 돌처럼 굳어버렸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긴장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둘 다 이유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여기요! 좀 도와주세요!!! 빨리요!!!” 목청 터지게 비명처럼 지른 소리는 목청 바로 앞에서 멈춰버렸다. 아...
이지는 돌아버릴 것 같았다. 제발! 제발! 이리로 뛰어 오란 말야! 와서 좀 도와 달라구!!! 제발! 제발! 빨리! 빨리!!! 거구의 사내는 그러나, 태평스럽고 느긋하게 다가올 뿐이었다. 너무도 너무도 천천히. 왜 그렇게 느린 거니? 목소리가 막혀버린 이지의 심장은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이 네 번째였다는 것을, 이지는 나중에야 알았다. 심장을 쥐어 짜내는 이지의 기도가 또다시 시간의 흐름을 비틀어 휘게 만들었다는 것을, 이지는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동아 숯불갈비 건물 안의 시간이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엉금엉금 폐건물 쪽으로 걸어오는 덩치 큰 사내의 시간을 상대적으로 빠르게 만들면서, 폐건물 사방을 막은 벽 속 공간의 시계 초침(秒針)은 보통의 분침(分針)보다도 시침(時針)보다도 더 느리게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지의 심장은 안으로 조여 들어갔다. 툭! 온몸의 힘이 빠진 채로 이지는 폐건물 콘크리트 바닥에 주저앉았다. 거의 멈춘 듯이 공간 속을 헤엄치는 시간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이지는 서서히 옆으로 쓰러졌다. 폐건물 출입문 바로 옆 모퉁이 구석 바닥. 거미줄과 먼지가 덮고 있는 돼지기름 냄새 범벅 방석 더미 위로 머리가 고꾸라지면서 그대로.
이지는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