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공 1단지 103동 앞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50화

by rainon 김승진

이지의 심장은 안으로 조여 들어갔다. 툭! 온몸의 힘이 빠진 채로 이지는 폐건물 콘크리트 바닥에 주저앉았다. 거의 멈춘 듯이 공간 속을 헤엄치는 시간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이지는 서서히 옆으로 쓰러졌다. 폐건물 출입문 바로 옆 모퉁이 구석 바닥. 거미줄과 먼지가 덮고 있는 돼지기름 냄새 범벅 방석 더미 위로 머리가 고꾸라지면서 그대로.


이지는 의식을 잃었다.


깨어난 시각이 새벽 1시 반이라는 것을, 이지는 집에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다. 새벽 2시. 욕실. 샤워기가 쏟아내는 세찬 물줄기 아래 알몸을 웅크린 채로, 이지는 멈춰버린 기억 속을 이리저리 비집고 헤매며 안간힘을 썼지만, 아무것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동아 숯불갈비 폐건물 입구 바로 옆 구석에 쓰러져 있던 그 두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손등을 물어뜯는 초가을 밤 모기가 기절한 이지를 일으켜 깨웠을 때는, 폐건물 안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강간범으로 추정되는 얼굴 모를 남자도, 외마디 비명만 기억나는 피해 여성도, 느릿느릿 저만치서 걸어오던... 덩치가 크다는 것밖에는 알 수 없던 그 남자도 보이지 않았다. 꿈을 꾼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 피곤하다. 잠이 쏟아져 내린다. 침대 위에 풀썩. 이지는 꿈도 없는 깊은 잠 속으로 다시 쓰러졌다.


분명히 챙겼다고 생각했던 이지의 핸드폰은 장례식장 빈소 구석 주방 싱크대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장례 마지막 날. 발인, 그리고 화장과 납골을 모두 마치도록, 이지는 표정 없이 담담했다. “고생 많았어. 이지야. 이제 좀 쉬어. 작은 아빠 주변 정리는 천천히 해. 일단 몸부터 좀 추슬러야겠다. 너, 너무 지쳐 보여.” 자신을 꼭 안아주며 등을 토닥거리는 사촌 은옥에게 이지가 말했다. “고마워. 언니. 고마워. 잠깐만 자고 이따 가게로 갈게. 한 잔 하고 싶다.”


“에이! 씨! 나 좀 데리러 와. 여기가 어디냐면...” 한산시 지역구 국회의원의 어머니 밭에서 땀을 세 바가지 흘린 시의원 장세연의 목소리는 기진맥진, 힘이 하나도 없었다. 빌어먹을 저 가을무와 배추 씨앗들. 가만. 저 무랑 배추가 다 자라면... 그땐 김장한답시고 또 불러내는 거 아냐? 태연과의 통화를 마친 세연은, 세면기 수도꼭지에서 찔끔찔끔 새어 나오는 물방울들을 손바닥에 아껴 모아 얼굴에 끼얹으며 분통을 터뜨렸다. 배추밭 옆 컨테이너 구석, 지저분한 화장실 안. 세연은 이가 갈렸다. 시의원이 무슨... 국회의원 노비냐? 이거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대충 고양이 세수를 마치고 나오자, 양지헌 국회의원이 기다렸다는 듯 이지에게 막걸리 한 사발을 건넸다. “아이고, 우리 장 의원님. 오늘 보니깐, 아주 농사일이 딱 체질이네. 체질. 오늘 너무 고생했어요. 고마워요.” “어머. 제가 그렇게 잘했나요? 제가 더 감사하죠. 운동도 되고, 맑은 공기 마시면서 이렇게 땀 흘릴 수 있어서 제가 더 기쁜걸요? 의원님! 언제든 제 손이 필요하시면 꼭 또 불러주셔야 해요. 꼭이요!”


연거푸 들이켠 막걸리 세 사발. 세연의 온몸을 태우던 갈증이 사라진 자리에 적당한 취기가 차오를 무렵, 밭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농로 끝 도로변에 태연의 차가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세연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가 데리러 왔어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니, 벌써 가시게요? 좀 더 드시고 가시지.” 어쩜 넌 그렇게 눈깔 생겨 먹은 게 족제비를 똑 닮았니? 어딜 감히 바지 자락을 잡아? 족제비 닮은 양지헌 국회의원 보좌관의 손을 탁! 쳐내고서, 이지는 국회의원과 그 모친에게 89도로 허리를 숙여 깍듯이 인사하며 속으로 중얼댔다. 왜 90도가 아니냐고? 1도는 내 자존심이다. 이 금배지야!


조수석 문을 열었다 도로 닫고, 세연은 뒷좌석에 올라탔다. 운전석의 태연이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 지금 너무 더러워. 땀 냄새 장난 아닐걸? 이제 보니 널 부르는 게 아녔는데... 이런 몰골은 보이고 싶지 않은데. 에휴.” “올 때 차 안 가져온 거야?” “당협위원회 사람들이랑 같이 왔어. 무슨 교도소 강제노역 나가는 것도 아니고... 꼭두새벽에 버스로 실어 나르더라. 집으로 가자. 나 우선 좀 씻고 싶어. 배도 고프고.” 기어를 올리고 태연은 액셀을 밟았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는 저녁 7시 40분. 한산3동 주공 1단지. 103동 앞. 세 개비 째 꽁초를 구두코로 비벼 끄면서 박봉술은 투덜거렸다. “에잇! 이 새끼는 단 한 번을 시간 약속 제때 지키는 법이 없어. 싸가지 없는 자식!” 욕설과 함께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려는 박봉술의 눈에 익숙한 두 얼굴이 저만치에 보였다. 차에서 내려 함께 1~2라인 입구를 향해 나란히 걷는 두 남녀. 아파트 입구가 가까워지자 여자가 남자에게 몸을 찰싹 붙이며 팔짱을 끼었다. 살짝 당황한 듯 쭈뼛거리긴 했지만, 남자는 여자의 팔짱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렇게 다정한 두 연인이 103동 1~2라인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박봉술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아하. 요 깜찍한 꼬마들 보게? 장세연 의원. 니가 그렇게나 말단 직원 놈 승진을 나한테 신신당부했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저놈 이름이 뭐였드라? 유... 태연? 유태연? 그래 유태연!”


박봉술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아까 누르려던 연락처 대신, 박봉술은 한산타임즈 부하 기자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너 지금 어디냐? ...... 여기 한산3동 주공 1단지 103동 앞이야. 지금 당장 와. 너 오늘 뻗치기 좀 해야겠다. 차 가져오고, 카메라 꼭 챙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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