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타고 녹아내리는 눈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51화
by rainon 김승진 Feb 28. 2022
박봉술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아까 누르려던 연락처 대신, 박봉술은 한산타임즈 부하 기자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너 지금 어디냐? ...... 여기 한산3동 주공 1단지 103동 앞이야. 지금 당장 와. 너 오늘 뻗치기 좀 해야겠다. 차 가져오고, 카메라 꼭 챙겨!”
“에잇! 뚱땡이 영감탱이! 월급이나 제대로 주고 좀 부려 먹든가! 토요일 밤에 일을 시켜? 에라이!” 짜증을 확 내고서 남자는 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나야. 미안해, 정말. 지금 나가는 길인데, 아 글쎄. 우리 사장. 그 꼰대 새끼가 갑자기 뻗치기를 하라잖아! 혜지야. 미안해, 정말. 응?” 갑자기 데이트를 펑크 내게 된 젊은 남자는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이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내뱉는 투덜거림 속, 생소한 단어. 뻗치기? 뻗치기가 뭐지? 이지는 슬며시 핸드폰을 꺼내 검색창을 열었다. 뻗치기... 뻗치기... 사전에는 없는 말인데? ... 아! 이건가 보다! 접촉을 피하거나 접근이 어려운 취재원을 무작정 기다리는... 파파라치들이 목표의 사진을 몰래 찍기 위해 오랫동안 잠복... 기자인가 보네? 계속 뭔가를 중얼중얼 구시렁대는 기자가 먼저 내리고 나서, 이지는 엘리베이터를 나와 시가지로 향했다.
사흘간의 장례 기간. 몸과 마음 속 피로와 상처는 비탈길을 굴러 내려가는 눈 덩어리처럼 불어나며 덩어리 졌다. 그리고 지난밤. <동아 숯불갈비> 폐건물에서의 성폭행 사건 목격 직후의 실신은 그 피곤과 상처 덩어리를 결국 펑! 터지게 만들었다. 장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침대 위에서 기절한 두어 시간 동안의 숙면은, 그나마 이지의 몸 구석구석에 파편으로 박힌 상처 조각들을 조금 녹여낸 것 같았다. 그런데, 파편들이 일부 빠져나간 자리로... 짙고 무거운 외로움을 입은 공허함이 스며들어 오나 보다. 마땅히 함께 술잔을 기울일 사람도 없고... 이지는 속기사로 시의회에 취직하기 직전까지 일하던 사촌 은옥의 가게, 바 <쁘렘>의 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바텐더가 아닌 손님으로 여기 오는 건 오늘이 처음이네.
“야... 넌 좀 더 쉬지 않고, 왜?” 저녁 식사를 막 마친 듯, 배달 그릇을 문 앞에 내놓으러 가게 밖으로 나오던 은옥이 이지를 보고 핀잔을 던졌다. “깊이 잘 잤어. 나 오늘은 손님으로 온 거다. 뭐 시킬 생각 하지 마! 칵테일 주문 들어와도 언니 니가 만들어!” “풉!” “왜 웃어?” “내가 안 시켜도 니가 알아서 칵테일 만들 것 같은데?” “??? 무슨 소리야?” “얼른 들어가서 준 벅(June Bug) 한 잔 만드세요. 안이지 바텐더님! 니가 사모하는 훈남께서 지금 막 와 계신다네.” “훈남? .... 누구? ... 아!”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바 쪽으로 시선이 가는 것을 피하며 이지는 후다닥 먼저 화장실로 들어가서 거울을 보았다. 아... 간단하게라도 화장 좀 하고 나올걸. 장례 기간 동안의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맨얼굴 피부는 금방이라도 가루로 부서져 내릴 것처럼 푸석푸석. 젠장. 그냥 도로 집으로 갈까? 하던 생각은 기은석 의원에게 준 벅(June Bug) 한잔을 직접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에 이내 덮였다. 옷매무새를 고친 이지는 화장실을 나섰다.
“아! 어서 와요. 이지 씨! 그러잖아도 막 준 벅(June Bug) 지금 주문했어요. 일도 그만두셨다고 하고, 오늘이 발인일이라서 못 볼 줄 알았는데, 반갑네요.” “잠시만요. 금방 만들어 드릴게요!”
지방선거 3일 전, 당시 후보였던 기은석 시의원이 바 <쁘렘>을 처음 찾았던 날이 떠올랐다.
“제가 술 종류는 잘 몰라서요... 너무 독하지 않고... 또 무난한 맛으로 바텐더 님이 하나 추천해 주신다면 좋겠는데요.”
“준 벅. 어떠세요? 우리말로는 6월의 애벌레라는 뜻이죠. 빛도 초록이고 맛도 초록인 술이에요. 알코올 도수도 적당하고... 한 번 드셔 보시겠어요?” “네. 좋아요. 그걸로 부탁드립니다.”
중저음의 목소리에 다정하고 품격 있는 어조. 2년 가까이 바 <쁘렘>에서 일하는 동안 만나본 중에서 단연 첫인상이 가장 괜찮은 손님이라는 생각을...
그래, 그때 내가 했었지 생각하면서, 이지는 재료와 도구를 준비했다. 멜론 리큐르, 말리부, 크렘 드 바나나, 파인애플 주스, 사워 믹스를 칵테일 틴에 넣고 흔드는 이지의 손놀림과 표정은 경쾌했다. 석 달 전, 그날처럼.
“오늘은 일하러 오신 거 아니죠? 같이 한잔할까요.? “그럴... 까요?” 이지는 머뭇거리는 척하면서 기은석 의원의 옆자리에 앉았다. “언니! 난 하이네켄 한 병 줘!”
“잘... 모신 거죠? 정말 고생 많았어요. 다시 한번, 아버님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해요. 의원님. 마음 써 주신 덕분에... 장례 무사히 마쳤어요.”
준 벅 한 모금을 마신 기은석 의원이 뭔가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아버님... 사건. 아직도 범인을 못 잡은 거죠?” 푸른색 하이네켄 병에 붙은 라벨을 만지작거리며 이지가 대답했다. “단서가... 없다네요. 범인은 분명히 있는데... 잡을 방법이 없다고 하니. 이대로 그냥 덮이고 묻히게 되겠지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잡아야죠. 꼭 잡아야죠!” 흥분하여 살짝 언성이 높아진 기은석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지가 말했다.
“저는 범인을 알아요.” “??? 네? 아니 그럼 당장 신고를 해야...” 이지가 기은석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뇨. 제게 생각이 있어요. 제 방식대로 하려구요. 그런데 의원님.” 기은석이 이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가 언젠가... 곧... 의원님께 좀 도움을 청해도 괜찮을까요? 절... 도와주시겠어요?”
이지의 눈을 바라보며 기은석이 대답했다. “그래요. 기꺼이, 뭐든,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거라면 꼭 도와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정말.”
나란히 앉아서, 준 벅 석 잔, 하이네켄 3병을 비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동안, 이지도 기은석도 제법 취기가 올랐다. “이 사람과의 대화. 참 즐겁다. 참 좋다.” 이지 마음속 캄캄하고 텅 빈 방바닥에 초 한 자루가 돋아나고 불이 켜졌다. 마음의 온도가 조금씩 오르는 것을 천천히 느끼고 있는데, 기은석이 이지에게 말했다.
“눈이 보고 싶은데...” “눈? 눈이요? 의원님도 참. 눈 보려면 아직 몇 달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아뇨. 내리는 그 눈 말고, 이지 씨 눈을요. 우리 테이블로 옮길래요? 마주 보고 싶어요.”
서로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말없이 가만히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다정하고 따뜻한 눈빛의 대화 속. 둘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으로 두 사람은 같은 말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밤 11시. 이지가 사는 아파트 입구. “데려다주셔서 고마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이지 씨도 편히 쉬어요.”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기은석의 뒷모습을 이지는 바라보았다. 일곱 걸음쯤 걸었을까. 기은석이 몸을 돌려 안이지에게 다시 다가왔다. 그가 왜 다시 오는지를 이지는 알 수 있었다. 안이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기은석의 뜨겁고 촉촉한 입술이 와닿았다. 기은석을 꽉 끌어안으며, 이지는 입술을 열었다. 이지 마음속에 남은 상처의 눈 덩어리가 스르르 녹아내렸다. 눈을 타고 녹아내리는 눈. 녹아내린 그 눈이 이지의 눈을 타고 방울로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