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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 민법과 걷는 길...

새벽별 아래서(書)-05

by rainon 김승진

민법의 처음과 끝을 이으며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권리(權利)'다. 원래 '법'이라는 것이 생겨난 동기가 바로 "권리를 어떻게 공적(公的)으로 인정하고 지켜줄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권리'의 손에 쥔 '창과 방패'가 바로 '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법들에 있어서도 '권리'는 각기 다른 색깔과 모습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지만(이를테면 헌법의 절반을 차지하는 국민의 기본권, 소송법들의 흐름을 구성하는 절차상 권리 등등),


특히나 민법에 있어서는 '권리'라는 것의 무게가 각별하다. 민법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권리를 갖는 것은 누구인가?(권리의 주체), 권리의 대상은 무엇인가?(권리의 객체), 권리란 어떻게 발생하고 변경되며 소멸하는가?(권리의 변동)"를 규율하는 사법(私法)의 일반법.


이를테면 이거다. 내가(주체) 이 차를(객체) 길동이에게 팔았다(변동).


'주체'가 먼저 있고 나서야, 뭘(객체) 어떻게 하는지(변동)가 비로소 문제 되는 것. 때문에, 민법은 '권리의 주체'를 규율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민법(民法) 제3조.


제3조(권리능력의 존속기간)

사람은 생존한 동안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한 인간의 삶 여정을 따라 나란히 걷는 것이 민법이다. 천성이 착하고 게다가 일평생 주변에 선한 사람들만 있다면, 형법이나 소송법과는 인연을 맺지 않고 무탈하며 평온한 삶을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정말 아무나 받을 수 없는 아주 큰 복이다!) 하지만 사람으로 세상과 만나서 민법을 피해서 살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집이나 차를 사고파는 거래관계가 없이 평생을 무인도에서 홀로 산다고 할지라도, 물고기를 잡거나 나무 열매를 따는 자급자족적 행위들마저도 민법의 그물을 벗어날 수는 없다.(민법 제252조 무주물 선점) 애당초 인간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존재가 아니므로, 친족법에 의한 부모-자식 관계 규율에서도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1차적으로 민법 제3조는 포괄적인 선언적 규정으로서, 그 누구도 도망칠 수 없게 모든 사람들을 민법의 영역 안에 가둬버리는 울타리와 같은 조문인 셈이다. 교과서에서 민법 제3조를 논할 때는 '생존한 동안'의 시작(출생)과 끝(사망) 포인트를 어디로 볼 것인지가 주요 쟁점이 된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는 민법 제3조의 의의는, 사람(정확히는 대한민국 국민)은 예외 없이 전부 다 민법의 테두리 안에 있음을 선언했다는 데 있다.


무려 1천1백 개 하고도 18개나 되는(삭제된 조항들이 있으므로, 실제 유효한 조문 수는 그보다는 적다.) 민법 조문들을 아주 큰 두 덩어리로 쪼개서 살펴본다. 그 하나는 '삶'에 관한 법이며 다른 하나는 '사랑'에 관한 법이라... 고 말하면, "좀 억지스럽지 않으냐?"는 반문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틀린 말 아니다.


민법은 '재산법'과 '가족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민법 전체를 관통하는 일반원칙들을 맨 앞에 모아둔 '총칙'편도 결국엔 재산법과 가족법에 적용되는 법규정 들이니, 어쨌든) 민법은 재산관계와 가족관계를 규율하는 법이라고 할 수 있다.


재산관계는 '삶'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산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기본적인 개인의 욕구들을 충족해 가는 과정이다. 먹고 마시고 입고 잠자고... 그러하기 위해 스스로의 노동을 제공하거나, 가진 돈 또는 물건을 빌려주거나 팔아서 대가를 얻는 것. 평균의 월급쟁이가 보내는 보통의 하루를 생각해보면 쉽다. 아침에 눈 떠, 어제 제과점에서 사 둔 샌드위치 한 조각을 욱여넣고 전철에 오른다. 부지런한 일개미로 일과를 보낸 대가는 한 달에 한 번 통장을 스쳐서라도 지나간다. 퇴근 후 동료들과의 맥주 한 잔. 주말에 즐기는 영화 한 편... 아! 집주인이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하네... 딴 집을 알아봐야겠다. 부동산 중개사무소에 들렀다 나오는 길에 맡겨둔 세탁물을 찾고...


모든 삶의 사건들은 물권법과 채권법의 촘촘한 그물에 모조리 다 걸린다. 스스로 전혀 의식도 못하는 일상적이고 소소한 사건들, 샌드위치를 사고 전철을 타고 맥주를 마시고 영화를 보는 행위, 이 모든 생활 속 에피소드들이 민법의 규율 대상이다. 그래서 민법의 '재산법' 편은 '삶'에 관한 법이다.


친족법과 상속법을 합쳐놓은 가족법의 출발은 남녀의 만남, 즉 사랑이다. 한 쌍의 남녀가 인연을 맺으면서 가족 탄생의 서막이 오른다. 남녀의 결합으로 자녀가 출생하며, 부모-자식 관계를 모체로 하여 형제자매 관계를 비롯한 친인척 관계가 가지를 뻗는다. 사랑의 시작인 혼인, 사랑의 종말인 이혼, 입양과 파양 및 친권, 후견, 부양 등... 남녀의 사랑, 부모-자식 간의 사랑과 그 파탄의 뒷수습까지 친족법은 친절하게도 간섭한다. 수평적 사랑(남녀 관계)과 수직적 사랑(부모-자식 관계)의 교차로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신호등이나 경찰관과 같은 것이 바로 친족법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앞서 살펴본 민법 제3조의 문언대로 "사람은 생존한 동안 권리와 의무의 주체"기에, 생존이 끝나는 순간 그 주체의 자리에서 퇴장한다. 하지만, 사람은 죽어도 권리와 의무는 죽지 않는다.(상속 포기와 한정승인의 예외는 일단 논외로 한다.) 바로 상속법이 존재하는 이유다. 생전 소유하던 모든 물건들과 받을 돈, 갚을 돈 전부 고스란히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주인을 찾아 나선다. 배우자, 자식, 형제자매, 삼촌, 사촌형제 그 누구도 없이 쓸쓸히 떠나면 국가에라도 물려준다. 살짝 씁쓸한 대목이다. 사람보다 물건의 생명력이 더 질기다는 사실. 각설하고. 이런 이유로 "상속법은 가족법인가? 재산법인가?"의 논쟁이 있기도 하지만, 대체로 상속법은 가족법의 틀 안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결론적으로 민법 '가족법'은 '사랑'에서 시작되고 '사랑'으로 유지되거나 '사랑'의 종말로 정리되는 '인간관계'에 관한 규율이다.


남녀(부모)의 사랑으로 인해 태어나 살아가는 법을 배워 세상 속을 헤쳐나가는 삶. 생존을 위해, 욕구 충족을 위해 부지런하게 살고. 그렇게 인생길을 걷다 만나는 반려자와 가슴 설레는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의 씨앗은 2세를 싹트게 하며 가족관계의 나무를 더욱 무성하게 한다. 모든 인간은 그 어느 날 찾아올 마지막을 향해 걷는 유한(有限)한 존재. 그 존재가 영겁으로 흩어져 사라져도 세상에 남는 물질들과 관계들을 뒷마무리 하는 상속까지, 민법은 삶과 사랑의 전 과정을 함께 하며 사람 곁에 언제나 있다. 인생의 첫걸음부터 마지막 걸음까지 내내...


살며 사랑하며 걷는 그 길에서, 민법은 한 인간의 권리를 지키는 창과 방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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