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이 상식보다 먼저”임을 선언한 민법 제1조를 뒤집는 반전이 바로 뒤따라 제2조에 등장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얼핏 보아, 권리 행사와 의무 이행을 성실히(!) 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읊은 것으로만 보이는 이 조항(신의성실의 원칙)은 그러나,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법규다. 한마디로 말해, 포커(Poker) 판의 조커(Joker)나 마찬가지. 그 어떤 법도 쓰러뜨릴 수 있는 무적 만능 치트-키(cheat key)라 해도 큰 과장은 아니다. 판사가 판결문에서 민법 제2조의 손을 들어주는 순간, 기존의 모든 법들은 추풍낙엽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외국에 이민을 가 있어 주택에 입주하지 않으면 안 될 급박한 사정이 없는 딸이 고령과 지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상태에서 달리 마땅한 거처도 없는 아버지와 그를 부양하면서 동거하고 있는 남동생을 상대로 자기 소유 주택의 명도 및 퇴거를 청구하는 행위는 인륜에 반하는 행위로서 권리남용에 해당할 것(대법원 1998. 6. 12. 선고 96다 52670 판결).」
이 사례를 두고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저게 재판까지 갈 일이야? 아니 세상에, 병든 제 아비를 모시기는커녕, 제 집에서 쫓아낸다는 것이 사람이 할 짓이야?” 보통의 ‘상식’과 건전한 사고를 가진 평균의 일반인 눈에는, 저 딸은 정말로 나쁜(!) 사람이다. 때문에, 일부 수험서나 강사들은 이 판례를 들어 말할 때 ‘패륜녀’ 판례라는 별명으로 칭하기도 한다.
(판결문에 나타난 정황만으로 누군가의 가정사를 속단해서는 안될 일. 드러나지 않은 어떤 속사정이 있을 수 있기에, 무턱대고(?) 이 케이스의 '딸'을 비난함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점을 전제한다. 다만, 이하에서는 판결문을 통해서 읽히는 상황들만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기초로 삼고자 한다.)
한국인의 정서에 비춰 보자면 너무도 ‘당연한’ 이 판결은, 그러나 ‘법’의 잣대로 따져보면 결코 ‘당연하지 않은’ 판례다.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이라 하더라도 내 것, 네 것은 분명히 구별하는 것이 ‘법’이다. 거동을 못하든 몸이 아프든 간에, 아버지든 할아버지든 간에, 남(!)의 집에서 살려거든 법이 인정하는 권리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 ‘법’이다. 하다못해 이 사안에서는 딸의 허락이라도 있어야만 ‘묵시적 사용대차’ 계약의 채권자로서 그 집에 머물 수가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법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보아도, “내 집에서 당장 나가라!”는 저 딸의 요구를 꺾을 법 조항은 없다고 보면 된다. 쉽게 말하자면 '법적으로는' 백전백승 딸이 이긴다는 얘기다. (부모 자식 간의 부양의무를 규정한 민법 제974조는 이 사안의 쟁점에서는 살짝 비켜 있기에 논외로 한다.) 여기서 판사들은 난감해진다. 그래서일까, 원심법원은 딸의 손을 들어주었다. 엄연한 집의 ‘소유권자’인 딸의 요구를 단지 ‘나쁘다, 못됐다.’는 ‘상식’만으로 뿌리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 민법은 ‘소유권 절대 보장’의 대원칙을 뿌리로 삼고 있다. 그 뿌리를 무시한 채로 일반의 ‘정서’에만 기대어 병든 노부(老父)를 길바닥에 나앉지 않도록 보호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참 법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차가운 기계’라는 생각도 새삼 든다.
원심법원의 판사들은, “딸의 요구가 권리남용으로서 민법 제2조가 정한 신의성실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늙은 아비의 절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분들도 그 판결을 내리고 나서 마음이 편치는 않았을 터) 결국 ‘법이 상식보다 먼저!’라는 민법 제1조에 충실했던 것이 원심법원의 판단이었지만,
그러나 대법관들은 원심법원의 그 판단을 뒤집어버린다. ‘효(孝)’가 먼저냐 ‘권리’가 먼저냐, ‘상식’이 우선이냐 ‘법’이 우선이냐를 두고서, 법복만 수십 년 입어 온 대법관님들의 고뇌도 깊었을 것이다. 그 고뇌 끝에 결국, 민법 제2조 신의성실의 원칙의 손을 들어주며 딸의 소유권 주장을 깨버린 것이다. 늙은 아버지의 서러워서 뜨거운 눈물 방패가, 권리를 앞세운 딸의 차가운 얼음 창을 녹인 이 판례는, 이리하여 민법 제2조 신의성실의 원칙을 대표하는 판례로 길이 남게 되었다.
분명한 것은, 이 사안의 경우 아버지와 딸이라는 그 특수한 관계가 잠자던 민법 제2조를 깨웠다는 사실이다. 부녀지간만 아니었다면, 보통의 경우 남의 집에 무단으로 기거하는 사람은 법이 절대 보호하지 않는다. (단지 민사 상 퇴거 요구로 끝나지 않는다. 주거침입죄로 형법적 처벌을 받을 수도 있으니)
그래서 민법 제2조 신의성실의 원칙 앞에는 늘 ‘일반조항으로의 도피’를 경계하는 신중함이 도사리고 있다.'함부로 쉽게 꺼내서는 안 되는 최후의 칼'인 것이다. 너도나도, 이 판결도 저 판결도 신의성실의 원칙을 앞세운다면, 세상의 모든 법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 테니까. 포커(Poker) 판에 조커(Joker)는 1장으로 충분하다. 조커가 여러 장이면 포커 판은 아사리판이 된다.
유교적 ‘효(孝)’ 관념이 뿌리 깊은 우리나라기에 이 판례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가능하다. 부모-자식 관계에 대한 인식이 우리 같지 않은 외국이었다면, 아비는 아무리 늙고 병들었어도 딸의 집에서 나가야 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법 제2조 신의성실의 원칙은, 아주 가끔씩, ‘법’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사안을 풀어내는 국민정서법 내지 일종의 감정적 처방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법전 속의 추상같은 법 규정도 깨버리는 신의성실의 원칙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문제 해결에 적용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소정의 자격과 수련을 거친) 판사들뿐이다. 때문에 “법을 만드는 건 국회의원이고 법을 깨는 건 판사”라는 명제도 가능하겠다. 금배지님들이 만드신 법도 (일시)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이 법복(法服)의 막강한 힘이다.
신의성실의 원칙은, 법규정의 보호막이 미처 닿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처한 사회적 약자들의 최후의 보루다. "법이 그렇다고요? 아무리 그래도 이럴 수가 있나요?"라 외치는 이들의 마지막 지푸라기일런지도 모른다. 그 지푸라기 한 가닥을 밧줄로 바꿀 수 있는 공적(公的) 권능은 오로지 법관에게만 허락된다.
그래서... 법관은 그 역할과 책임이 무겁고 또 무거운 것이다. 그 사실을! 존경하는대한민국의 판사님들께서 다시금 가슴에, 깊고 무겁게 새기시길 감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