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각몽(自覺夢)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53화

by rainon 김승진

세연의 가슴에 피어난 들장미 문신을 어루만지며 태연은 장미꽃잎 사이로 부풀어 오른 분홍 꼭지를 살짝 깨물었다. 세연의 입술을 비집으며 가느다란 신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밤은 길고, 그리고 뜨거웠다. 그렇게 103동 301호를 채운 공기가 다시 데워지고 있을 때...


이지의 아파트 안은 차가웠다. 핸드폰 속 녹취파일 3개를 반복해서 듣고 있는 고 안명훈의 딸, 이지의 눈동자에서는 투두둑, 얼음 조각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잠깐 의식을 잃었나... 정신을 차린 이지의 턱까지 차오른 숨이 목젖을 할퀴며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아직 9월, 초가을인데... 악악 내뱉는 입김은 찬 공기를 만나 하얗게 부서졌다. 너무 추웠다. 살갗을 찢는 바람의 톱니는 소름 끼치게 차가웠다. 그래서 이지는 알 수 있었다. 이건 꿈이구나. 그런데 추워. 그런데... 난 지금 왜 달리고 있지? 자욱한 안개 저 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덩치의 사내. 그래, 저 새끼를 쫓고 있었지! 이 개자식! 나한테 잡히기 전에 숨이 넘어가기를 기도해라. 그게 차라리 감사할 거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한 말, 너도 알고 있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이 지구 상 동서남북 어디서도 네 시체를 찾을 수 없을 거다. 내가 잘근잘근 씹어먹을 테니까!” 그런데...


왜 저렇게 빠른 거야? 고도비만의 뚱보는 점점 작아지다 안갯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심장이 터져라 뛰어도 이지는 놈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놓치면 안 되는데! 제발, 제발! 다급한 간절함이 거친 숨으로 터져 나왔다. 이지의 두 뺨으로 분한 눈물이 흘렀다. 흐르는 눈물은 얼굴을 때리는 찬바람에 부서져 안갯속으로 흩어졌다. 이지의 거친 숨이 격한 흐느낌으로 변하는 그때...


뒤통수가 싸늘했다. 무엇을 마주칠까 무서웠지만, 이지는 달리는 속도를 조금 줄이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 악! 방금 전까지 뒤통수를 노려보며 죽을힘 다해 달려 쫓던 덩치 큰 사내가 거꾸로 이지를 쫓아오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쫓다가 쫓기는 신세. 박봉술에게 잡히지 않으려 미친 듯이 달리던 이지는 그제야 깨달았다. 운동장이었다. 트랙이었다. 동그라미. 안이지와 박봉술은 서로를 쫓고 서로에게 쫓기며 시작도 끝도 없는 둥근 트랙 위를 정신 놓고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왜 도망을 가야 하지?


이지의 달음박질이 멈췄다. 뒤쫓아 오던 박봉술도 그에 맞춰 제자리에 섰다. 180도 몸을 돌린 이지가 박봉술을 향해 걸어갔다. 박봉술도 이지를 향해 히죽거리며 다가왔다. 둘 사이 거리가 다섯 걸음쯤 남았을까. 그제야 이지의 눈에 박봉술의 손에 쥐어진 각목이 보였다. 저 각목. 검게 말라붙은 저 피는 아빠의 피겠지. 뚜벅뚜벅. 맨손으로 박봉술에게 걸어가다가... 악!


이지는 갑자기 몸의 균형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푹 꺼진 땅속 구덩이. 우물 바닥의 마른 풀더미는 다행히 푹신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일어선 이지의 눈앞으로 아빠의 피가 묻은 각목이 날아왔다. 가까스로 피한 이지가 비명을 질렀다. 그게 신호 이기라도 하듯, 우물 위에서 녹색 덩굴줄기가 바닥으로 던져졌다. 필사의 몸부림. 이지는 덩굴줄기를 움켜쥐었다. 그렇게... 덩굴줄기를 붙잡고 우물 밖으로 나온 이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우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박봉술은 없었다. 피 묻은 각목만 우물 바닥 건초더미 위에 던져져 있었다. 이건 꿈이 맞는데... 그런데 이건 무슨 꿈일까... 우물 옆에 털썩 주저앉은 이지는 자신의 목숨을 살린 고마운 덩굴줄기에서 손을...


떼려 했지만 떼지 못했다. 푸른색 덩굴줄기는 이지의 손을 시작으로 팔과 다리, 얼굴과 온몸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기어 다니면서 자라는 뱀처럼 녹색 덩굴은 이지의 몸 전체를 칭칭 감으며 꽉 조이고 있었다. 이렇게 죽나? ...... 이제 그만 날 깨워줘...


이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좀 씻어야겠어... 땀으로 뒤범벅이 된 이불을 박차고 이지는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 찬물 세례가 갑자기 이지의 머릿속에 뭔가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대강 몸을 닦고 나와 핸드폰을 열었다. 아침 9시 45분. 전화 걸기에 무례한 시간은 아니다.


요란한 핸드폰 벨소리에 태연이 잠에서 깨어났다. 자신의 목을 감고 있는 세연의 팔을 조심스럽게 풀면서 태연은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어? 발신인 안이지.


“어! 이지야.” “휴일 아침인데 전화해서 미안해... 갑자기 생각 난 게 있어서...” “괜찮아. 말해.” “니가 녹음한 그 파일 있잖아. 아빠 그렇게 만든 놈 목소리. 그거 녹음된 날짜랑 시간, 휴대폰에 다 기록되어 있지?” “어... 아마 그럴 거야.” “그거 파일 저장된 연월일시 화면, 캡처해서 좀 보내줘. 부탁할...”


탁! 태연의 손에서 세연이 전화기를 낚아챘다. “통화 중이잖아! 지금 뭐 하는...” 당황한 태연을 뿌리치며 세연이 핸드폰에서 얼굴을 조금 떼고 말을 했다. 들으라는 듯이...


“자기야! 뭐해! 하다 말고...... 계속해 줘~ 그래 거기. 좀 더 부드럽게... 응. 응. 아...” 짐짓 꾸며내는, 그러나 너무도 자연스러운 세연의 신음과 교성에 태연은 그만 기가 막히고 말았다. 화난 얼굴의 태연이 세연에게서 핸드폰을 빼앗았다. “이지야... 그게 아니고...”


“미안해. 내가 전화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던 거 계속하세요. 내가 방해를 했네. 선데이 모닝 섹스, 계속 즐기세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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