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유통기한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54화

by rainon 김승진

요란한 핸드폰 벨소리에 태연이 잠에서 깨어났다. 자신의 목을 감고 있는 세연의 팔을 조심스럽게 풀면서 태연은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어? 발신인 안이지.


“어! 이지야.” “휴일 아침인데 전화해서 미안해... 갑자기 생각 난 게 있어서...” “괜찮아. 말해.” “니가 녹음한 그 파일 있잖아. 아빠 그렇게 만든 놈 목소리. 그거 녹음된 날짜랑 시간, 휴대폰에 다 기록되어 있지?” “어... 아마 그럴 거야.” “그거 파일 저장된 연월일시 화면, 캡처해서 좀 보내줘. 부탁할...”


탁! 태연의 손에서 세연이 전화기를 낚아챘다. “통화 중이잖아! 지금 뭐 하는...” 당황한 태연을 뿌리치며 세연이 핸드폰에서 얼굴을 조금 떼고 말을 했다. 들으라는 듯이...


“자기야! 뭐해! 하다 말고...... 계속해 줘~ 그래 거기. 좀 더 부드럽게... 응. 응. 아...” 짐짓 꾸며내는, 그러나 너무도 자연스러운 세연의 신음과 교성에 태연은 그만 기가 막히고 말았다. 화난 얼굴의 태연이 세연에게서 핸드폰을 빼앗았다. “이지야... 그게 아니고...”


“미안해. 내가 전화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던 거 계속하세요. 내가 방해를 했네. 선데이 모닝 섹스, 계속 즐기세요들.”


탁! 태연은 핸드폰 케이스를 닫고 침대 위에 던졌다. “아니, 넌... 왜 그래?”


세연이 태연을 노려보았다. “왜?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너야말로 왜? 이 시간에 이지가 너한테 전화를 왜 하는 건데?”


“부탁할 게 있다잖아!” “무슨 부탁?!!” “그게... 저... 아...”


태연의 말문이 막혔다. 이지 아버지 폭행치사범의 목소리 파일. 세연에게 말해도 되는 건가... 어디까지 얘기를 해도 되는 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이지가 그랬는데...


“나야말로 화가 나거든? 대체 안이지는 왜 일요일 아침에 너한테! 응? 전화로 대체 뭘 부탁을 하는 거냐구!!!”


침대 위 핸드폰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태연을 세연이 다그쳤다. “빨리 말 안 해?”


짧은 고민을 끝낸 태연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이 벌레 같은 새끼야! 은혜를 원수로 갚아? 너한테는 새꺄! 공기도 사치다! 배은망덕한 짐승 새끼는 숨 쉴 자격 없어!”

“...... 여보세요. 형! 큰 형님!! 박, 봉 자, 술 자! 우리 큰형니임~!!! 전화 끊지 마요! 끊지 마! 분명히 말했어! 전화 끊으면 나 바로 경찰서 갈 거야. 다 불어버릴 거야! 이것 봐요. 봉술이 형!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만 했어. 그런데 이게 뭐야? 사람이 죽어버렸잖아! 난 이렇게까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엉? ...... 형님 덕분에 내가 살인자가 됐다고요!!!”


“이지 아버지가 구타당하던 현장을 우연히 직접 봤어. 그리고 장례식장 화장실에서 바로 그놈 목소리를 들었고...”


동공이 커진 세연의 눈꺼풀이 깜빡거렸다. “그럼... 이지 아빠를 그렇게 만든 범인이... 배후가... 박봉술이라는 얘기야?”


“그런 것 같아. 정황상 그래 보여... 근데... 박봉술을 너도 알아?”


“한산타임즈 박봉술을 모르는 사람이 어딨냐? 그런데... 이거 당장, 아니 진즉에 신고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모르겠어. 이지는 절대 경찰에 신고하지 말래.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어쨌든 난 녹음파일을 이지한테 넘겨줬어. 방금 전화는, 그 파일 녹음된 날짜랑 시간 화면 캡처해서 보내달라는 거였고...”


태연의 핸드폰을 끌어당긴 세연이 파일을 다시 재생했다. “봉술이 형!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만 했어. 그런데 이게 뭐야? 사람이 죽어버렸잖아!”


“도대체... 이지 아버지는... 무슨 원한을 샀길래, 그렇게 끔찍하게...” 말을 잇지 못하는 태연의 긴 한숨을 세연이 가로막았다.


“저번 선거 때, 이지 아빠가 현병규 시장 캠프 총책임자였어. 사무장... 선거 운동하면서 나도 오다가다 몇 번 만났어. 근데 박봉술은 현병규 시장 친구야, 아주 친한 친구.”


태연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럼... 이지 아버지랑 박봉술도 같은 편? 뭐 그런 셈이잖아... 현병규 시장도 재선에 성공했고... 그런데 박봉술이 왜 이지 아버지를 죽인 거지?”


말없이 세연은 생각에 잠겼다. 선거 기간... 박봉술... 현병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뭔가가 어렴풋이 떠오를 듯 말 듯 머릿속을 희미하게 맴돌았지만, 더 생각하기를 멈추고 세연이 침대에서 일어나 태연을 끌어안았다. “나 배고파. 밥 먹자. 나가서 먹을까? 뭐 먹지?”


주공 1단지 103동 1~2라인 출입문을 나서는 태연과 세연. 둘을 감싸는 일요일 오전의 가을 햇살 틈으로 찰칵찰칵, 카메라 렌즈의 눈초리가 깜빡거렸다. 조수석에 앉은 박봉술이 태연에게 팔짱을 끼는 세연의 밝은 미소를 흉내 냈다. “고것들... 참 깜찍하고 귀엽고만... 역시... 젊은 게 좋은 거야. 음...”


“저... 대표님. 저, 곧 예배가 있어서... 잠깐 교회 좀 다녀와도 될까요?” 운전석에 앉아 셔터를 누르던 한산타임즈 기자 최수환이 쭈뼛거리며 박봉술의 눈치를 살폈다.


“수환아.” “네, 대표님.”


“있잖아... 음... 넌 진짜 신이,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냐?”


최수환 기자가 울상이 되었다. “저... 대표님. 여자친구한테 혼난단 말이에요. 자기랑 같이 교회 안 다니면 결혼 안 해주겠다는데...”


“아니, 아니. 교회는 다녀와. 가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야. 그냥 질문 그대로 내가 궁금한 거야. 너는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해?”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일단 있다고,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고 교회 열심히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없으면 본전이고, 만약 하나님이 진짜 있으면 천국 갈 수 있잖아요. 안 믿고 안 다니다가, 진짜 하나님이나 지옥이나 천국이 있으면? 그때 후회하기엔 너무 늦잖아요.”


지잉... 탁탁! 박봉술이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풉. 신? 그걸 누가 하냐? 대한민국에서만 하루에 뒈지는 인간이 8백 명이 넘어. 그걸 매일매일 어떻게 일일이 심판을 하냐고, 응? 신도 밥 먹고 똥 싸기도 바쁠 텐데. 담배도 피워야 하고...” 연기를 길게 내뱉고 박봉술이 말을 이어갔다.


“수환아. 천당도 지옥도... 그런 건 없어. 이 세상은 내가 태어나는 순간에 창조되었고, 내가 죽는 순간에 멸망하는 거야. 니 목숨의 유통기한이 세상의 유통기한이야... 가봐. 교회. 내가 있을 테니까, 여자친구랑 점심도 먹고 좀 놀다가 한 2시까지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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