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6월의 애벌레 – 제55화
지잉... 탁탁! 박봉술이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풉. 신? 그걸 누가 하냐? 대한민국에서만 하루에 뒈지는 인간이 8백 명이 넘어. 그걸 매일매일 어떻게 일일이 심판을 하냐고, 응? 신도 밥 먹고 똥 싸기도 바쁠 텐데. 담배도 피워야 하고...” 연기를 길게 내뱉고 박봉술이 말을 이어갔다.
“수환아. 천당도 지옥도... 그런 건 없어. 이 세상은 내가 태어나는 순간에 창조되었고, 내가 죽는 순간에 멸망하는 거야. 니 목숨의 유통기한이 세상의 유통기한이야... 가봐. 교회. 내가 있을 테니까, 여자친구랑 점심도 먹고 좀 놀다가 한 2시까지 와.”
세연의 SUV가 한정식 식당 <설하(雪夏)> 주차장에 멈췄다. “여기 점심 특선도 괜찮아. 예약 안 하고 왔는데... 아마 자리는 있겠지?”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우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 세연이 태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근데... 너...”
“응? 뭐?” 핸드폰 속 폭행범 목소리의 녹음 날짜와 시각 화면을 캡처해서 이지에게 보내던 태연이 고개를 들어 세연과 눈을 맞췄다.
“바로 얼마 전에, 여기서 내가 너한테 청혼한 거, 설마 까먹은 거 아니지?” “...... 응.” “언제 대답할 거야? 계속 기다리게 할 거야?”
“세연아... 결혼은 우리 좀 천천히 시간을 두고...” “유태연!” “... 어...?”
“나, 아무 하고나 그렇게 막 자는 여자 아니야.” “아니, 난 그런 뜻이 아니...” “나 헤픈 여자로 만들지 마! 그냥 즐기려고 너 만나는 것 아니니까...... 지금 당장 식 올리자는 소리 아니야. 미래를 약속하잔 얘기야!”
“알겠어... 조금만 시간을 좀 줘...”
찰칵! 세연이 태연의 조수석 안전띠를 풀며 볼에 입을 맞추었다. “밥 먹자. 여기 점심 특선, 날마다 주요리가 바뀌는데, 오늘은 뭘까나...”
식당 입구 현관에서 사장이 세연과 태연을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세요. 의원님. 아! 근데... 지금 저, 기은석 의원님도 저쪽에 와 계시는데요. 혹시 같이 식사하시는 건가요?”
“??? 아뇨? 기 의원님이 오셨어요?” “네. 안쪽, 죽(竹)실에 계십니다.”
식당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세연이 반쯤 열려 있는 죽(竹)실 문을 노크했다. 굳이 일부러 마주칠 필요가 있나? 세연과 함께 있는 모습을 기은석 의원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태연은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세연 뒤를 쫓아갔다. “어? 의원님이 여기 웬일로?” 기은석의 목소리였다.
“어? 안이지 씨랑 같이 오셨네요? 전 유태연 씨랑 같이 왔어요.” 세연의 입에서 이지의 이름이 나오자, 태연은 머리가 아파졌다. 그런데 태연의 그 아픈 머리를 기은석이 한 대 더 쥐어박는 것이었다. “아, 반갑네요. 괜찮으시다면, 뭐... 같이 드실까요?” “아뇨, 저희는 그냥 따로 먹을게요.”라고 제발 말하기를 바라는 태연의 속내와는 반대로, 까르르, 쿨하게 세연이 웃었다. “그럴까요? 유태연 씨! 우리 여기서 같이 먹어요. 들어오세요!”
장세연! 넌, 항상 이런 식이야... 니 멋대로! 슬그머니 태연은 화가 났지만, 잠자코 신발을 벗고서 죽(竹)실로 들어섰다.
<설하(雪夏)> 죽(竹)실 안. 어색한 침묵을 깨려 각자 앞에 놓인 물컵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물컵을 만지작거리거나, 물을 조금씩 나누어 홀짝거리거나, 그도 아니면 물컵에 새겨진 글자 <설하(雪夏)>의 획을 눈으로 따라 긋거나...... 나름 각자 눈치의 속도가 평균 이상이라 자부하는 네 남녀는 금세 상황 파악을 마쳤다. 시의원과 시의회 직원이 짝을 이룬 두 커플들은, 자신들의 사이가 탄로 나면서 동시에 상대 커플의 사이를 간파하는 동안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피장파장, 주거니 받거니. 그와 함께 암묵적인 약속. 서로 모른 척 하자. 이심전심. 끄덕끄덕. 굳이 상대 커플에게 뭘 묻지도, 해명하지도 않기로 하는 무언의 약속이 끝나자,
식당 사장이 직접 음식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 주요리는 갈비찜입니다. 오늘 우리 주방장님 컨디션이 아주 좋아요. 자신 있답니다. 맛있게 드세요... 아! 저쪽 건너편 방에 시장님도 와 계세요.”
“현병규 시장님이요?”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세연이 되물었다. “네, 다른 손님 한 분이랑 계세요. 오늘은 수행 비서 없이 혼자 오셨어요.”
날씨 얘기, 치솟는 물가 얘기, 갈비찜은 어디가 또 맛있더라... 그닥 대단치 않은 화제들과 함께 넷은 함께 밥을 먹었다. 주로 장세연과 기은석 두 시의원이 대화를 주도하는 사이, 이지와 태연은 별말 없이 젓가락만 바삐 움직였다. 생선 가시를 발라내어 이지의 앞접시에 놓아주는 기은석을 보고 태연은 순간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제는 그럴 자격도 없음을 이내 절실히 깨달았다. 아까 전, 아침, 이지와의 통화가 떠올랐다. 전화기를 낚아채서 입으로 포르노를 연기해 버린 세연 덕분으로, 이제... 이지에게 돌아가는 길은 영원히 끊겨버린 터에... 내가 무슨 주제로 기은석을 질투하겠나... 입맛을 잃은 태연은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그런데 기은석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통화 좀...” 기은석 의원이 선수를 치는 바람에 태연은 일어서려다 단념했다. 안이지와 장세연, 둘만 남겨두고 자리를 비우기가 싫어졌다.
통화를 마친 기은석 의원은 화장실에 들르기 위해 죽(竹)실을 지나쳐 식당 구석 쪽으로 향했다. 그 순간, 죽(竹)실 대각선 건너편 매(梅)실 안쪽에서 고성과 욕설이 튀어나왔다. 옥신각신 오가는 쌍욕의 목소리 중 하나가 익숙했다. 현병규 시장의 고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