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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Apr 25. 2022

바람이 흘린 눈물

[소설] 도가니탕 - 2화

그 ‘외롭지 않게’, 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마지막 길을, 내가 동행하고 있다.


버스가 터미널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태어나서 13년을 살았던 시골 동네 초입의 터미널 근처는 성형수술을 열댓 번 한 노처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군에서 △△시로 신분 상승이 되는 동안, 촌 동네라는 낙인을 지워 내려 어지간히도 노력한 흔적이, 이제는 어엿(?)한 지방 중소도시로 변신, 아니 변장한 (과거) 시골의 여기저기에 묻어 있었다. 걸레는 천 번을 빨아도 행주가 될 수 없다고 했던가... 억지스러운 도시화의 꾸밈은 그저 웃기기만 할 따름이었다. 간판만 세련되게 바뀌었으되, 그 이름은 20년 전 그대로 「낭만과 추억」인 터미널 맞은편 건물의 지하 다방이 그런 것처럼.


「낭만과 추억」이라고는 개미 발톱의 때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고향, 터미널 흡연 구역 재떨이에 꽁초 하나를 보태고 나니, 피곤이 몰려왔다. 어젯밤 11시 47분. 문자 메시지. 「고 문경선 님의 명복을 빕니다. 부검 결과, 사인은 수면제 과다 복용에 의한... 기타 범죄로 인한 타살의 정황은 없는 것으로...... 시신 인수 절차를 안내드립니다......」 핸드폰을 식탁에 내려놓고, 남은 캔맥주를 싱크대에 버리고, 침실로 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기억나지 않는 꿈으로 잠을 설치고, 이른 아침, 병원 영안실에서 시신을 찾고...... 화장장의 두 시간은 지루하고 따분했다. 그리고 유골함을 받아 곧장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버지 같지 않으면서 아버지라고 불렸던 인간은, 자식들이 말귀를 알아먹을 나이가 되자마자부터 수천 번을 되풀이했었다. “나 죽거든 무조건 화장해라. 납골당에 가두지 마라. △△천 아무 데나 그냥 강물에 뿌려라.” 아버지라는 인간은, 혹여라도 자식들이 유골을 납골당에 정중히 안치해 드릴 거라는 크나큰 착각을 하고 살았었나 보다. 결국 둘째 아들과 막내딸은 경찰서에도, 시신이 하루 머문 영안실에도, 화장장에도, 모습도 드러내지 않았는데 말이다. 아버지라는 인간의 자살과 시신 발견 소식을 접한 두 동생은 짧은 한마디만을 던지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형(오빠) 알아서 해.” 먼저 세상을 스스로 등진 어머니가 살아 있었다 해도 그랬을 것이다. “너 알아서 해.”


동생들에 대한 서운함도 원망도 전혀 없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폭군 술주정뱅이의 무자비한 손찌검에서 비켜나 있던 건 가족 중 유일하게 나였으니까. 치가 떨리는 집착과 간섭, 폭언과 강요는 가족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맞지는 않았다. 차라리 나도 좀 두들겨 패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을 지경으로, 그 인간은 장남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었다. 이유는 지금도 정확히 모른다. 그나마 삼 남매 중에서 제일 고분고분한 편이라서였을까? 아버지라는 인간의 마음에 흡족할 성적표를 매달 코앞에 들이밀어 주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기가 죽고 나면 시신이라도 거두어 줄 누군가 하나는 아쉬웠던 걸까. 그게 이유라면 아버지라는 인간은 목적 달성한 거다. 뼛가루를 뿌려주기 위해 이틀이나 연차를 내는 인간이 그나마 이렇게 있으니 말이다.


반짝. 「낭만과 추억」 다방의 간판에 불이 들어오면서 간판 네 귀퉁이를 에워싼 전구들이 시계 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다. 유리로 된 물 잔에 떨어진 잉크 한 방울처럼, 4월의 공기에 갑자기 어둠이 슬슬 퍼지기 시작했다. 벌써 땅거미가 깔릴 시각이 되었나? 순간의 의아함은 하늘을 올려다보니 해소되었다. 쨍쨍하게 맑던 하늘이 검은 먹구름에 잡아 먹히는 중이었다. 빗방울들이 낙하산을 입고 있었다.


뼛가루는 내일 뿌리기로 했다. 한 손에 유골함을 든 것만도 귀찮은데, 다른 손에 우산까지 쳐 받들고 싶지는 않았다. 비 오는 날 두 팔이 잘려 나가는 느낌은 딱 질색이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전혀 생겨나지 않고 있는, 혹시라도 모를 일말의 청승이나 연민이, 혹시라도 빗방울에 취해 마음으로 스며 올까 봐서, 그게 싫었다. 교회와 군대가 내겐 그랬었다. 도무지 10원짜리 동전만큼도 공감을 주기 어려운 그 집단들은, 교묘하게 잘 연출된 음악으로 사람의 마음을 혹하게 했었다. 그럴싸하게 사람을 도취시키는 군가나 찬양이 끝나고 다시 정적이 시작되면, 마치 술이 깨고 난 아침을 맞이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잠깐 뭐에 홀린 거지? 그래. 어쩌면 빗방울과 음악과 술은 같은 것일지도.


잠시 터미널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그나마 깨끗해 보이는 모텔에 방을 잡았다. 침대 옆, 객실 중앙 탁자에 아버지라는 인간을 올려 두고, 밖에 나와 거리로 나섰다. 다시 홀가분해진 오른쪽 어깨에 자유가 내려앉는 동시에, 구름을 탈출한 빗방울들의 어깨에서도 낙하산이 막 펼쳐지고 있었다. 잔인하리만치 시커먼 하늘빛과는 영 다르게도, 빗방울들은 곱고 얌전했다. 실비였다. 굳이 우산이 필요하지 않도록, 빗방울들은 자잘한 조각들로 부서져 도시의 하늘과 땅 사이 공간을 아주 아주 느리게 적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래알보다 작은 듯한 그 빗 조각들 틈새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바람이 빗방울 조각들을 뿌리고 있었다. 바람과 비가 얼굴과 머리를 보드랍게 두들겼다. 갑자기 어지럽다. 빗방울이 머리카락을 지나 두피를 뚫고 뇌 속으로 들어온다. 그렇게... 실비를 뿌리는 바람이 기억 깊숙이 박힌 뭔가를 끄집어내고 있었다. 일곱 글자.


바람이 흘린 눈물.


편지. 15년 전의 편지. 유치하고 찬란하던 사춘기 연서(戀書) 속에서, 열다섯 소년은 자못 진지하고 섬세했었다. 아마도 그날은, 오늘처럼 실비가 흩뿌리던 봄날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만의 여신, 열다섯 해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던 베아트리체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그라들게 겉멋을 부려 그렇게 말했었던가. “비는, 오늘처럼 이렇게 잔잔하고 예쁘게 내리는 이 실비는... 마치 눈물과도 같아. 바람이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그래, 이 비는 바람이 흘린 눈물이야.”


그 편지가 마지막 편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서 몇 번째 편지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편지에의 답장에서 희연은 말했었다. “그 표현 참 마음에 쏙 들어. 바람에게도 분명 눈물이 있을 거야. 만약 바람이 눈물을 흘린다면 꼭 그런 날씨가 맞을 거야.” 이미 오래전에 버려진 희연의 편지들 속, 딱 그 ‘공감’의 대답 하나만 기억에 남았다는 것을, 오늘에야 나는 여기 와서 알게 되는구나. 그렇게...


바람이 흘린 눈물에 조금씩 젖으며 터미널 근처 골목 사이를 정처 없이 걷다가...


발이 멈췄다.

술집이었다.

간판이었다.


[바람이 흘린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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