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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Apr 22. 2022

수면제와 소주

[소설] 도가니탕 - 1화

남쪽을 향해 고속버스는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그에 맞춰 휙, 휙 뒤로 달아나는 차창 밖 경치는 왠지, 달리는 버스보다도 더 빠른 것 같았다. 세월도 비슷하다. 시간 위를 걸어가는 속도보다도 더 빨리, 곁에 있던 것들은 저 멀리로 등을 보이며 도망쳐 버린다.


모든 것은 다, 떠나간다. 막을 방법이라는 것은 없다. 곁에 오래도록 머물러 주었으면 싶은 누군가, 무언가도, 머무는 척하다가, 머뭇머뭇 뒷걸음질 치다, 이내 등을 돌리고 뛰어가 버린다. 그런가 하면,


곁에 오래도록 남지 말았으면 하는 이들이, 또는 것들이 오히려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기도 한다. 바로 지금 내 옆자리에 놓인 그것이 바로 그러했다. 참, 질기도록 내 삶에 달라붙어 있던, 아니 내 삶을 달라붙이고 놓아주지 않았던 그도, 결국에는 거짓말처럼 떨어져 나갔다. 고개를 돌려 검은 보자기를 가만 내려다본다. 검은 보자기가 감싼 흰 도자기, 흰 도자기가 감싸고 있는 그보다 더 하얀 가루. 61년 동안, 먹고 자고 싸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노름을 하고 마누라와 새끼들을 패고 젊은 애인들과 섹스를 했다. 가루가 되기 위해서, 그는 말이다.


차창을 뚫고 들어온 햇빛이 따듯하다. 어제도 그랬다. 경찰서 1층. 내게서 진술을 받고, 지장을 받고, 그 대가로 인주를 닦아낼 물티슈를 줬던, 그 형사의 낡은 철제 책상을 비추던 오후 햇살도 따뜻했다.


“문경선 씨 아드님 맞으시죠? 먼저 간단히 신분 확인을 위해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차분하게 주민등록번호와 주소를 읊고 있는데, 기다란 면봉을 든 흰 장갑이 얼굴로 향해 왔다. “목 크게 벌리시고요. 네... 됐습니다.” 유전자 감식은 참 야하게도 간지러운 거구나. 목젖을 스치며 면봉이 남긴 감각은 상황과는 전혀 맞지도 않게도, 성감(性感)이었다. 다행히 발기는 되지 않았다.


“아뇨.” “전혀 몰랐습니다.” “특별한 얘기 없었습니다.” “원래 자주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본 건... 석 달 전쯤으로 기억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모릅니다.” 


내 대답들은, 변사체 발견 사건 형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서 뭐, 그도 딱히 실망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갑자기 왠지 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 경찰 아저씨... 발견 당시는, 그 두어 시간 전에 맛있게 먹었을 점심이 아직 위장에 남아 있을 때였을 텐데.


“이분입니다. 아버님을 처음 발견하신...”


어디서 봤더라... 그래. TV. 언젠가 보았음이 분명한 무슨 다큐 프로그램에 나왔던, 딱 그 행색을 하고 다소곳이 앉은 키 작은 남자는 4분의 1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살짝 초점을 잃은 눈으로 잠깐 내 얼굴을 살펴보던 심마니 혹은 약초꾼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체를... 내가 시체를... 너무 무서워서 내가...” 이런...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보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라도 해야 하나. 경찰서 조사실 안의 공기 밀도가 상승하는 느낌이었다. 어서 여기를 나가고 싶다.


“돌아가신 지는 한... 보름 정도 된 것 같구요. 현장에 유서는 없었지만, 빈 소주병 3개, 수면제 빈 캡슐 100개가 있었던 것으로 봐서는, 자살로 보입니다.” 침착한 목소리로 발견 상황을 설명하다 말고, 형사는 잠깐 내 눈치를 살폈다. 아마도.


슬픔이나 충격 따위는 억지로도 입고 있지 않은 내 속내의 맨얼굴에 당황했거나 감탄해서이겠지.


“이제 가셔도 됩니다. 경찰서 정문 나가셔서 왼쪽으로... 간판이 아마 보일 겁니다. OO병원 지하에 모셔져 있습니다. 오늘 밤늦게나 검사 주재로 부검이 있을 거고요. 부검 소견이 단순 자살로 나오면, 핸드폰 문자로 알려드립니다. 그럼 내일 시신을 인수하셔서...”


공기 밀도가 높았던 경찰서 바깥으로 나오자, 갑갑했던 호흡을 뚫어주는 봄바람을 뚫고서 4월의 햇살이 서른 살 고아의 정수리에 쏟아졌다. 감사할 일이다. 서른 살에야 드디어 고아가 되었으니. 만시지탄.


병원 지하 영안실. 하얀 천을 걷어내려던 장의사가 말을 걸어왔다.

“저, 그런데...” “네?” “지난주 내내 비가 많이 와서, 그래서인지 시신 부패 상태가 너무 심한데... 직접 보기가 좀 그러시면 나중에 사진으로다가...”


“아뇨. 괜찮습니다. 안 봐도 됩니다.” “빈소는 어떻게?” “장례 없이 바로 내일 화장할 겁니다. 화장장 예약 부탁드립니다.” “밖으로 나가시면 오른쪽에 사무실 있어요. 거기에 말씀하세요.”


“네. 그럼... 어디 보자. 오늘 안치 비용이랑, 내일 운구 비용이랑... 수의, 관...”


계산기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예쁘다는 생각을 잠시 하다 고개를 올려 보니, 장례식장 경리 직원은, 희연을 꽤나 닮았다. 희연... 선희연. 그 이름이 떠오른 것이 십오 년 만인가.


“일시불로 해 주세요.” 편의점에서 담배 1갑을 사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카드 결제를 마치고 다시 경찰서로 향했다.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며,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과장님. 갑자기 일이 좀... 이틀만 연차 좀 내겠습니다...... 아뇨. 뭐 안 좋거나 그런 일은 아니구요. 네, 감사합니다.”


동료 경조사에 빠짐없이 보냈던 봉투에 든 지폐만 모아도 경차 두 대는 뽑았을 것. 하지만 경조사비 본전을 챙기기 위해 회사에 부고를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갑작스러운 부친상. 회사로 걸려온 경찰서의 전화. 꼬치꼬치 물어오는 호기심들을 구구절절 설명으로 만족시키고 싶지 않았다. 위로도 애도도 내겐 전혀 필요 없었다. 동료에게 일어난 사고는 한갓 자기들 술자리 씹을 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 ‘자살’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아버지 같지도 않은 인간의 마지막 길을 ‘외롭지 않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외롭지 않게’, 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마지막 길을, 내가 동행하고 있다.


버스가 터미널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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