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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Apr 26. 2022

술 파는 년의 딸, 희연

[소설] 도가니탕 - 3화

바람이 흘린 눈물에 조금씩 젖으며 터미널 근처 골목 사이를 정처 없이 걷다가...


발이 멈췄다.

술집이었다.

간판이었다.


[바람이 흘린 눈물]


담배에 불을 붙였다. 라이터 불꽃 위로, 벚꽃잎 떨어지는 속도로 내리는 빗방울 알갱이가 바람에 흩날리며, 희연의 모습이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선희연. 초등학교 동창, 아버지라는 인간이 뻔질나게 드나들던 단골 요정(料亭) 주인 마담의 딸, 아버지라는 인간이 담임했던 중학교 제자... ‘바람이 흘린 눈물’을 은밀히 공유했던 세상 단 한 사람. 어느 한 소년의, 세상의 전부. 희연.


입구로 다가갔다. 밟으면 바사삭 부서져 내릴 것만 같은 낡은 나무 계단이 아래로 내려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그런데 첫 번째 나무 계단에 왼발을 딛자, 삐그덕. 경고음이었다. 정말 내려오려고? 들어오려고? 만나려고? 지나쳐서 가던 길 그대로 갈 기회는 아직 남았어. 다시 생각해 보지, 그래? 저 아래 그녀가 있다. 분명히 있다. 쓰이다 멎은 인연의 책장을 이제 와 굳이 다시 펼칠 것인가, 그대로 덮어둘 것인가. 혼란 속 고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 이미.


나무 계단 끝, 지하 술집 입구 유리문을 밀고 있었다.


“어서 오세”

쨍그랑, 출입문에 매달린 종들이 흔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바(Bar) 여주인의 인사는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그리고, 이미 십오 년 전에 새겨진, 책장 끝, 마지막 문장 끝의 마침표를 즈려밟고 선 초저녁 손님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


십오 년 시간을 건너서 다시 만난 남녀, 그 사이 3미터 공간을 채우던 3초간 침묵을 깨고, 희연이 말했다.


“어서 와. 오랜만이네.” 그녀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지나갔다. “앉아.”


“저녁은 먹었어?” “아니, 아직.”

“찹-스테이크 있는데, 그거 줄까?” “그래.”

“술은 뭘로 할래?” “아무거나 줘.”

“우리 가게에 그런 이름 술은 없는데?” “잭 다니엘 있으면 줘, 콜라도 같이.”

“잭-콕 좋아하는구나? 조금만 기다려.”


바로 어제 헤어지고 하루 만에 다시 보는 얼굴을 대하듯, 그녀도 나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담배 피우지? 여기 종이컵에 떨어.”


그녀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앉은 채로 회전의자를 돌려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바에 다섯 자리, 홀에 4인용 테이블 두 개. 그 옛날 그녀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시골 요정(料亭) 크기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좁은 술집의 벽면 여기저기에는 따뜻한 기분이 들게 하는 추상화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게 은은한 푸른 조명은 야하도록 부드러웠다. 그 빛을 품고 떠다니는 먼지 사이로는, ‘빌 에반스(Bill Evans)’의 피아노가 <왈츠 포 데비(Waltz For Debby)>를 노래하고 있었다.


두 대째 담배에 불을 붙이자, 접시와 술병을 든 희연이 주방에서 나왔다.


“어쩐 일이야? 이 시골엔?”

“그냥... 왔어.”

“너, 중1 때 전학 가고서... 한 17년 만에 온 건가?”

“15년. 15년이야. 나 전학 가고 나서도, 다른 가족들은 여기 2년? 정도 더 살았었잖아. 뭐 유학 가 있는 동안에도 왔다 갔다 했으니까.”

“맞다. 너네 가족 다 서울로 이사한 게 고1 때였지? 아. 어머니는... 잘 계셔? 네 어머니, 참 고우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온더락 글라스에 갈색 잭 다니엘을 반쯤 따르고, 그 위를 검은 콜라로 덮었다.


“돌아가셨어. 몇 년 전에.”

“...... 아. 미안해.”

“아냐. 뭐가 미안해? 넌, 어머니 잘 지내셔?”

“나도야. 고3 때, 엄마 죽었어.”


“그랬구나...”

화제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니 가게야? 인테리어 잘했네. 분위기 좋네.”

“뭐. 술 파는 년 딸 팔자가 어디 가겠어? 물장사가 유전인가 부지.”


‘술 파는 년 딸’.

그 단어들을 무표정하게 내뱉은 희연의 표정과는 달리, 내 마음은 담담할 수가 없었다.

‘술 파는 년 딸’.

중학교 1학년.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고쳐 써서 부친 첫 고백 편지. 며칠 후 우편함에 꽂힌 희연의 답장을 아들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으면서 그랬었다. 아버지라는 인간은. “어디, 세상에 계집년이 그리도 없냐? 공부해야 할 새끼가 무슨 연애질이야? 그것도 술 파는 년 딸이랑?”


바로 그 술 파는 년이 주인인 시골 요정(料亭) 단골이던, 시골 여중학교 선생은 삼 남매 중 그나마 공부 머리가 있던 장남을 인근 대도시로 유학 보냈다. 물론 갓 사춘기에 들어선 중학교 1학년생을 자유롭게 뒀을 리는 없다. 시골 여중학교 선생이, 자신의 큰 형님 집으로 자식을 보낸 것이, ‘술 파는 년의 딸’과의 거리를 더 멀게 떨어뜨려 놓기 위해서였던 것인지, 그건 지금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영영 알 수도 없다. 열세 살 풋사랑을 찢어 놓은, 아니 찢으려 했던 폭군은, 저기 골목 뒤 허름한 모텔 3층 방에서 가루가 되어 하얗게 잠자고 있다. 하지만 아직 살아 있다 해도 물어볼 생각은 없다.


“문... 문...” 기억을 쥐어 짜내느라 희연의 미간이 구겨졌다. 다리미가 필요해 보였다. “문경선.” “그래, 맞아. 문경선. 문경선 선생님은 잘 계셔?”


빌어먹을... 빌 에반스(Bill Evans). 바 안을 흐느적거리며 흐르는 피아노 선율은 하필, 계속 빌 에반스(Bill Evans)였다. 사랑하는 연인과 사랑하는 친형을 연달아 자살로 잃은 빌 에반스의 생애를, 희연은 알고서 묻는 건가. 연달아 자살이었다는 것만 같은 건가. 사랑하는 어머니와 증오하는 아버지, 빌 에반스와 나는 비슷한 듯 달랐다.


“죽었어. 어제, 아니 한 보름 전에. 어제 시신을 찾았어.”


언뜻 미묘한 색깔의 빛이 그녀의 눈망울을 반짝 훑고 갔다. 당혹스러움과... 그리고... 설명할 단어를 모르겠다. 그 어떤... 감정이 희연의 눈빛에 어리다가 이내 혜성처럼 사라졌다.


“결혼은 했어?”

왜 이따위 멍청한 질문을 하는 걸까, 난.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후회했다. 그런 내 후회를 다독이듯, 그녀는 여전히도 담담하게, 읊조리듯 대답했다. “한 번은 했지. 다신 안 할 거고. 애 없이 이혼한 거. 딱 그거 하나는 그 새끼한테 고맙네. 후↗훗.”


후↗훗.

후↗훗. 어릴 적 그녀는 웃을 때면 늘, 마지막 음절을 세 음(音) 높여서 맺곤 했었다. 지금도 그렇구나... 생각을 할 무렵, 그녀의 웃음소리 끝음절이 갑자기 세 음(音) 점프하는 것과 동시에,


취기가 확 밀려왔다.


그 이후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취하기 시작할 무렵, 희연은 간판 불을 끄고 가게 문을 잠갔던 것 같다. 그리고는 함께 찹-스테이크를 씹으며, 함께 위스키에 콜라를 섞어 마셨다. 알코올은 기억을 완전히 녹이지는 못한다. 드문드문, 기억의 테이프는 듬성듬성 구멍이 뚫린 누더기가 되고 있었다. 누더기 한 귀퉁이에 새겨진 그녀의 목소리. “숙소가 어디니? 데려다만 줄게. 너 혼자서는 잘 못 걷겠어.”


모텔 방문 앞. 내가 희연을 안아서 안으로 끌어당겼는지, 희연이 나를 안고서 방문을 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15년 만... 아니지, 태어나서 처음. 내 혀가 희연의 혀를 감싸 안았다. 내 팔이 희연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녀의 등. 블라우스 지퍼를 내리고 브라 호크를 풀었다. 그녀의 등. 뜨거웠다. 그보다 더 뜨거운 봉긋함, 그 위로 솟은 수줍은 분홍색은 잔뜩 긴장해서 딱딱해져 있었다. 단단한 핑크빛 아이스크림을 혀로 녹여내며 그녀의 마지막 것을 벗길 때,


침대 옆, 열린 창문으로,


먹구름을 벗어난 빗방울의 자잘한 조각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바람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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