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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Apr 28. 2022

삶이 끊고 죽음이 이은

[소설] 도가니탕 - 4화

15년 만... 아니지, 태어나서 처음. 내 혀가 희연의 혀를 감싸 안았다. 내 팔이 희연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녀의 등. 블라우스 지퍼를 내리고 브라 호크를 풀었다. 그녀의 등. 뜨거웠다. 그보다 더 뜨거운 봉긋함, 그 위로 솟은 수줍은 분홍색은 잔뜩 긴장해서 딱딱해져 있었다. 단단한 핑크빛 아이스크림을 혀로 녹여내며 그녀의 마지막 것을 벗길 때,


침대 옆, 열린 창문으로,


먹구름을 벗어난 빗방울의 자잘한 조각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바람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늦은 아침, 눈을 떴을 때, 희연은 없었다. 혹시...? 영화 속 클리셰 공식을 따라 몸을 일으켜 살펴보았지만, 침대 머리맡에도 탁자에도 메모 같은 것은 없었다. 어디로 간 거지? 그녀의 자취 대신, 침대 옆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라고 불렸던 인간의 생(生)이 타고 남은 자취였다.


하얀 가루가 든 흰 도자기를 감싼, 검은 보자기를 쳐다보면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술과 섹스에 취했던 밤, 그 검은 커튼이 걷히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15년 만에 다시 만난 첫사랑과 첫 섹스를 하는 아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면서 아버지라고 불렸던 인간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어젯밤 취중 대화. 알코올이 미처 녹이지 못한 희연의 이야기가 스멀스멀 뇌 표면으로 떠올랐다.


“기억나? 너네 집으로 보내면, 선생님이 편지를 미리 읽고 찢어 버린다고... 그래서 우리 읍내 우체국 앞에서 몰래 만났었잖아. 아니다. 그건 만나는 것도 아녔지. 학교 끝나고 우체국 계단 옆 우체통 앞에서 말야. 무슨 간첩들 접선하는 것처럼... 후후↗훗! 진짜 서로, 교복 옷깃만 스치면서 말야. 누가 볼까 봐 몰래 편지를 교환했었던 거. 서로 눈만 아주 잠깐 보고, 편지만 주고받았던 거. 기억나?”


바람이 흘린 마지막 눈물방울은 햇살에 타면서 무지개를 그린다. 그래, 어젯밤 희연의 목소리는 그 무지개를 닮았었다.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기울인 술잔 속으로 무지개가 피어났었다. 기억이 난다.


“그것도 기억나? 너 □□시로 전학 간 뒤로는, 너 큰아버지 집에서 산다고... 큰아버지도 널 감시해서 편지 그리로 못 받는다고, 그래서 누구더라? 이름은 까먹었다. 암튼, 니가 알려준, 너네 반 친구 집 주소로 내가 편지 보내고 그랬었는데. 후후↗훗!”


무지개처럼 찬란하던 내 십 대의 첫사랑. 그 무지개의 마지막 색깔은, 그러나, 보라색이 아닌 검은색이었다.


“중3 때,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이었잖아. 문경선 선생님이... 그때도 계속 맨날 우리 집에 와서 술 드셨는데... 어느 날, 밤에 갑자기 엄마가 날 부르는 거야. 저쪽 방에 잠깐 가보라는 거야. 선생님이 날 부른다고.” 말을 멈추고서 희연이 잭-콕 한 잔을 단숨에 비웠던 것도, 기억이 난다.


“엄청 취해 있었어...... 나한테 부탁을 하더라고. 학교에서 보던 그 무서운 호랑이가 아니더라고. 그날 밤에... 나한테 진짜로 울면서 사정을 하시더라. 너랑 더 이상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편지 보내지 말라고. 제발 부탁한다고...”


중3, 낙엽이 지기 시작하던 때로 기억한다. 어느 날부터, 그녀로부터, 더 이상 편지가 오지 않았다. 그랬었다. 그렇다고서 몇 날 며칠 식음을 전폐하거나, 이불속에서 울지는 않았다. 몇 달간 독감 같은 실연을 앓아 낸 사춘기 소년은 다시 두 번째 사랑을 시작했다. 그렇게 끝났던... 그 끝의 수수께끼가 15년 만에 풀렸다. 편지를 계속 주고받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조카가 등교한 사이에, 아마도, 아버지라는 인간의 형이라는 인간이 조카 방을 뒤졌겠지. 그렇게 끝나는가 싶었던...


인연. 살아 있던 당신이 끊어버렸던 그 인연을, 죽은 당신이 다시 이어주는구나.


이 무슨 아이러니... 피식 웃다가 담배를 비벼 끄고, 욕실에 들어서려는데 모텔 객실 현관문이 달칵 열렸다.


“일어났어? 잠깐 집에 가서 씻고 왔어. 모텔 샴푸나 바디 워시는 잘 안 맞아서. 빨리 씻어. 나가서 아침 먹자.”


비는 모두 그쳤다. 희연의 차는 가격도 사양도 높은 고급 세단이었다. “이 근처는 맛있는 집이 없거든. 한 10분만 가면 돼.”


시골에서도 더 깊이 들어간 시골 변두리, 도가니탕 집 메뉴는 쿨하다 싶을 지경으로 간단했다. 도가니탕 또는 설렁탕. “도가니탕, 여기 맛있어. 해장에도 은근히 괜찮아.”


“나, 도가니탕, 안 먹어. 설렁탕 먹을게.”


“안 먹는다고? 못 먹는 거야? 안 먹는 거야?” “안 먹는 거야.”


진하게 우려냈을 사골 국물이 속을 뜨끈하게 채우자 간밤이 남긴 숙취도 거의 가셨다. 계산을 마치고 차에 오르자, 희연이 물었다. “어디로... 모실 거야?”


말 없는 나에게 희연이 말했다. “나도 같이 가.”


“...... 전에 살던 집 바로 앞. △△천.” “나 어딘지 알아.”


희연이 액셀을 밟으며 핸들을 꺾었다. 사이드미러에 비친 식당 간판의 글씨 [도가니탕]은 좌우로 뒤집혀 있었다. 뒤집힌 글씨가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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