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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May 02. 2022

도가니탕

[소설] 도가니탕 - 5화(완결)

“나, 도가니탕, 안 먹어. 설렁탕 먹을게.”


“안 먹는다고? 못 먹는 거야? 안 먹는 거야?” “안 먹는 거야.”


진하게 우려냈을 사골 국물이 속을 뜨끈하게 채우자 간밤이 남긴 숙취도 거의 가셨다. 계산을 마치고 차에 오르자, 희연이 물었다. “어디로... 모실 거야?”


말 없는 나에게 희연이 말했다. “나도 같이 가.”


“...... 전에 살던 집 바로 앞. △△천.” “나 어딘지 알아.”


희연이 액셀을 밟으며 핸들을 꺾었다. 사이드미러에 비친 식당 간판의 글씨 [도가니탕]은 좌우로 뒤집혀 있었다. 뒤집힌 글씨가 멀어지고 있었다.


간밤에 내린 비를 만난 하천의 빛깔은 한층 더 진한 물빛이었다. 앞다투어 쏟아지는 4월의 태양빛 조각들이 그 물빛을 다정하게 어루만지자, 흥분한 강물이 파르르 떨었다. 그 잔물결을, 강둑 위에 서서,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물은 천천히 그리고 쉼 없이 흐르고 있었다.


강둑 아래로 향한 돌계단을 천천히 밟으며 내려갔다. 유골함을 든 희연이 두어 걸음 뒤로 나를 따라왔다. 차에서 내리면서 희연은, 자기가 유골함을 들겠다고 했다. 그러라고 했다. 어제 이후 줄곧, 희연은 한 번도 아버지를 욕하거나 탓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첫사랑을 찢어달라고 애원했던 중3 담임선생에게, 희연은 무슨 감정을 느끼는 걸까. 알코올 중독자, 도박 중독자, 바람둥이, 언어폭력과 신체 폭력을 아낌없이 가족들에게 선사했던 제왕적 폭군 가장의 교실 속 모습은 어떠했을까. 알고 싶지 않다. 혹시라도, 만약에라도 마치 설리반 선생처럼 존경할 스승이었다 하더라도, 그런 이중적인 위선의 가면은 개 같던 그의 삶을 치장하여 덮기엔 모자랄 테니까.


강물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분명 흐르고 있는데, 흐르는 것 같지 않았다. 흐른다... 는 것이 무얼까. 앞선 물방울의 꼬리를 붙잡는 뒷 물방울의 손 따위는 물론 보이지 않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흐른다는 것. 앞 물방울이 뒷 물방울을 잡아끄는 건가, 뒷 물방울이 앞 물방울을 밀어내는 건가... 아니. 앞이고 뒤고 물방울의 구별 따위는 없는 걸까. 흘러 내려가는 것이란, 그 자체로 그저 한 덩어리가 움직이는 것일까. 물이란, 흐름이란... 애초부터 영원토록 쪼개거나 끊을 수 없는 것... 일까.


강물에서 뗀 시선을 건너편으로 옮겼다. 족히 이백 년은 넘었다고 하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여전했다. 뿌리에서 뻗어 이백 년 세월을 버텨온 밑동은 십오 년 전, 내가 이 강가를 떠나던 때처럼, 그리고 이십오 년 전, 그 그늘 아래서 놀던 아이 때처럼 똑같았다. 마치 흔한 번개무늬의 꺾임과 비슷하게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다 다시 왼쪽으로 치우친 후, 하늘로 곧게 뻗은 특이한 모양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왼쪽으로 비스듬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 것처럼 수직으로 꺾는 부위에 시커멓고 큼직한 옹이구멍도 그대로였다.


이십오 년 전에, 십오 년 전에... 공기가 그러하듯, 물이 그러하듯, 늘 거기 그 모습이어서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그 익숙함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번개무늬 밑동과 큼직한 옹이구멍을, 난 마치 태어나서 처음 보는 기분으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느티나무 아래 밑동과 옹이구멍에 모든 시력을 다 쏟아내면서, 시야의 중앙에는 나무만 남았다. 그리고 나무 밑동과 옹이구멍에 전력을 다하는 사이, 시야의 가장자리는 희뿌옇게 녹아 사라졌다. 눈자위 주변이 흐려졌다. 눈가를 구름이 덮는다. 그리고 구름 속으로 시간이 거슬러 뒤로 흐른다. 다섯 살.


시리도록 눈부신 하늘이 내려앉은 느티나무 아래, 삼십 대 중반의 남자와 그의 어린 아들이 캐치볼을 하고 있다. 휴일이었고 낮이었다. 남자는 술에 취하지도, 욕설을 입에 물고 있지도 않았다. 둘째 아이를 임신한 남자의 아내는 강 건너, 한옥 안방에서 낮잠에 잠겨 있고, 남자와 아들이 손에 낀 글러브 사이를 오가는 테니스공은 유쾌하게 빨랐다. 아이는 즐거웠다. 앞으로 아주 오래도록 아이가 잊고 있을 4월의 태양과, 하늘과, 부자(父子)의 함박웃음을, 바로 옆 느티나무의 밑동 옹이구멍이 차근차근 담아놓고 있었다.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이날의 풍경을 찾아올지도 모를 아이를 위한 갈무리에는 남자와 아들의 웃음소리가 흠뻑 묻었다.


꿈보다 깊이 묻혀 있던 기억이 한낮 꿈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강가에 서 있던 희연이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아 보자기를 풀고 유골함 덮개를 열었다.


4월인데, 강물 위에는 눈이 내린다. 눈물은 내리지 않고, 그 대신,


물 위에 눈이 내린다.


어릴 적 살던 한옥은 버려진 채 비어 있었다. 툭 건드리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은 폐가 정면에서 바라본 툇마루를 비추는 오후 햇살은 탐스럽고 푹신했다. 다섯 살 아이는 아빠에게 손을 내맡긴 채 살풋 졸고 있었다. 남자는 아들의 손톱을 깎아주고 있었다. 탁, 탁. 잘린 손톱의 경쾌한 비명 위로, 부엌 큰 솥이 우려내는 사골과 도가니의 들큼한 비린내가 춤추고 있었다.


고속버스 터미널 흡연실은 비어 있었다. 희연과 나는 나란히 앉아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흡연실 좁은 창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빛은 담배 연기에 젖어 파르스름했다. 그 파랗게 젖은 햇빛을 올려다보는 희연의 옆모습을 훔치듯 바라보았다. 아름다웠다.


반쯤 태우다 먼저 담배를 비벼 끈 희연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또 볼 수 있을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희연도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랬으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십오 년 만에 봤으니, 다시 십오 년을 기다려야 하나? 아니다. 기다리지는 않을 거야.”     

나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잘 가. 혹시 다시 만날 그날까지, 잘 지내.”


“그래. 너도 잘 지내.” 우리는 서로 마주 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지나갔다. 어제, 술집 [바람이 흘린 눈물]에서 십오 년 만에 만났을 때의 그 미소와 똑같은 모양과 색깔이었다. 그 미소가 잠시 머물다 간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후↗훗! 그녀의 웃음소리가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뛰쳐나왔다. 대기 중이던 고속버스의 문이 열렸다.


늦은 저녁. 허름한 가게 문을 옆으로 밀어 열고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혼자 오셨어요?”

“도가니탕 하나, 소주 한 병, 주세요.”


테이블에 밑반찬을 늘어놓으며 얼굴을 유심히 살피는 주인 여자의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들었다. 조금 당황한 표정의 주인 여자가 변명하듯 말했다.


“아뇨. 죄송해요. 저희 가게 자주 오시는 단골 선생님이랑 너무 닮으셔서...” 빈 쟁반을 들고 주방으로 돌아가며 그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문 선생님은 요새 왜 통 안 오시지?”


탕이 나왔다. 숟가락을 들었다. 물컹하고 쫄깃한 소 무릎 연골이 입 안에 뜨겁게 차올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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