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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May 11. 2022

서양화를 좋아하는 서장

[소설] 가브리엘의 오보에 - 2화

눈꺼풀을 따갑게 찌르는 아침 햇살을 손부채로 쳐내며, 박 팀장의 두 눈은 초점을 잡으며 강둑 위를 응시했다. 여자다. 젊은...


흰옷을 입은 여자가 강물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에고. 한 선생님도 오늘 하늘섬 가시기는 틀렸네.” 박 팀장이 최 경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는 사람이야?”


“알다마다요. 저희 막내 피아노 선생님인데요.”

“피아노?”

“네, 읍내에서 피아노 학원 하시잖아요. 시골에 하나밖에 없는 피아노 학원이라, 동네 아이들은 거의 다 한 선생님한테 배우고 배웠죠.”


날카로운 햇볕에 잔뜩 찌푸린 미간을 사이에 둔 박 팀장의 양 눈초리가 다시 흰옷 여인을 향했다. “저기, 저 손에 든 건 뭐야? 여자들이 들고 다니는 가방 같지는 않은데.”


“아. 무슨... 뭐라더라? 들었는데 까먹었네요. 무슨 피리라고 하던데.”

“피리? 단소? 플롯? 오보에?”

“아. 맞다. 네. 오보에! 오보에라고 했던 것 같아요.”


그때 선장의 시신 근처에 몰려있던 탑승객들이 갑자기 우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만치 떨어진 선착장을 향해 사람들이 부지런히 걷거나 달리고 있었다.


“선주가 왔나 보네요. 빨리도 데려왔네요.”

“누굴 데려왔다는 거야?”

“임시로 배 운전할 기사를 데려왔겠죠. 사람이 죽었어도 배는 띄워야 하니까. 하늘섬이랑 육지를 연결하는 건 저 배 하나뿐이거든요.”

“섬에는 몇 명이나 살고 있어?”

“정확히는 모르겠고... 한 열 집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저기 오른쪽에 공동묘지가 있고, 그 옆에 숲이 가로막은 왼쪽으로 마을이 하나 있어요.”


시신을 태운 구급차와 경찰차가 먼저 강가를 떠났다. 잠시 강 너머 하늘섬에 뒀던 시선을 거둔 박 팀장이 조수석에 올라타자 최 경장이 시동을 걸었다.


“여기 육개장 괜찮아요. 어제 술 드신 거 맞죠? 해장에도 아주 좋습니다.”

아직 점심 먹기엔 이른 시각이었음에도 읍내 사거리 국밥집은 붐볐다. 최 경장이 스테인리스 컵에 물 따르기를 기다렸다는 듯, 박 팀장은 단숨에 냉수 한 컵을 벌컥벌컥 삼켰다.


“자넨 여기가 고향인가 봐?”

“저요? 네. 그렇죠. 여기서 태어나고 초중고 다 나왔으니까. 대학이랑 군대, 그리고 서울 노량진에서 순경 시험 준비할 때 빼고는 계속 여기 살았죠.”

“잘 좀 부탁해. 난 여기가 처음이라 잘 모르는 게 많아.”

“아유. 그야 당연하죠. 제 사수님인데요. 뭐든 언제든 질문만 주십쇼!”


뚝배기 속 뜨거운 고사리를 젓가락으로 건지면서 박 팀장은 흘끗 최 경장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눈치도 붙임성도 운전실력도 적당하고, 최소 평균 이상으로 착해 보였다. 적당하고 착한 부사수가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근데, 팀장님.”

“응. 왜?”

“저, 뭐 좀 여쭤봐도 될까요?”

“여쭤보세요.”

“여긴 왜 자원해서 오신 거예요? 이런 시골에. 제가 듣기론, 경찰대 출신에다 지방청 광수대 에이스라고...”

“경찰대 출신은 시골 내려오지 말라는 법 있어?”

“아뇨, 아뇨. 그건 아니고요. 그냥...”

“난 원래 시골이 더 좋은 놈이야. 차 막히고 사람 많은 거 딱 질색이다. 오래 살려고, 술 오래 먹을라고 온 거야. 물 좋고 공기 좋은 데서 먹으면 하루라도 더 살 거 아냐?”


키득거리던 최 경장이 갑자기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식당 출입문을 등지고 앉은 박 팀장은 최 경장이 경례를 붙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뭘 또, 밥 먹다 경례는 무슨. 그래. 많이들 먹어. 나갈 때 계산하지 말고 그냥 가.”


서장이었다. 이틀 전 전입 신고 때 보고 나서 처음이었다. 박 팀장은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든 채로 가볍게 고개만 숙였다. 잠깐 박 팀장을 떨떠름하게 바라보던 경찰서장은 동행인들과 함께 별실로 들어갔다. “아이고, 서장님, 강 사장님, 오셨어요?” 식당 주인이 잰걸음으로 서장 일행 뒤를 쫓아갔다.


“차에 가 있어. 나 화장실 좀.” 식당 화장실은 서장 일행이 들어간 별실 복도 끝 구석에 있었다. 볼일을 마치고 별실 앞을 지나치던 박 팀장의 걸음이 멈췄다. 직업병이었다. 귓등으로 스쳐 가는 생판 모르는 남들 사이 대화에서도, 뭔가 불량스러운 냄새가 나면, 저절로 박 팀장의 발은 정지했다.


“에이, 고작 오백 잃은 걸로 엄살은. 야. 난 천칠백 날렸어! 담번엔 종목을 좀 바꾸자. 난 서양화로 쳐야 끗발이 붙더라. 이제 고도리 안 쳐! 세븐 오디나 바둑이로 다시 붙어!”


서장의 목소리였다. 이어 그보다 한 끗 더 불량스러운 목소리가 따라 나왔다.


“근데, 칠성이 새끼는 어쩌다가... 선장 월급, 그거 얼마나 한다고, 애초부터 지 주제에 맞게 놀았어야지. 근데 여기 왜 물을 안 줘? 어이! 김 사장!!!”


드르륵. 별실 미닫이문이 열렸을 때, 이미 박 팀장은 식당을 나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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