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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May 14. 2022

피아노 학원

[소설] 가브리엘의 오보에 - 3화

“에이, 고작 오백 잃은 걸로 엄살은. 야. 난 천칠백 날렸어! 담번엔 종목을 좀 바꾸자. 난 서양화로 쳐야 끗발이 붙더라. 이제 고도리 안 쳐! 세븐 오디나 바둑이로 다시 붙어!”


서장의 목소리였다. 이어 그보다 한 끗 더 불량스러운 목소리가 따라 나왔다.


“근데, 칠성이 새끼는 어쩌다가... 선장 월급, 그거 얼마나 한다고, 애초부터 지 주제에 맞게 놀았어야지. 근데 여기 왜 물을 안 줘? 어이! 김 사장!!!”


드르륵. 별실 미닫이문이 열렸을 때, 이미 박 팀장은 식당을 나서고 있었다.


퇴근 후 푹 한잠을 마치고 시장함을 느낀 박 팀장은 원룸을 나섰다. 저녁 8시 반. 일찌감치 인적이 끊긴 읍내는 한산했다. 뭘 먹을까 궁리하며 어슬렁거리는 박 팀장 앞에 간판이 눈에 띄었다.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가게는 아니었다. 저게 높은 음자리표였던가? 아니, 낮은 음자리표인가? 학창 시절 음악책에서 보았던 듯한 음표와 기호들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피아노 그림. 그 아래로는 그 옆 골목으로 들어가라는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아까 오전, 황토돛배 선장 변사체 발견 현장에서 보았던 하얀 옷 여인이 다시 생각났다. 여기 하나뿐인 피아노 학원 선생이랬지? 계속 걸어가면서 박 팀장은 슬쩍, 피아노 학원으로 향하는 골목을 향해 눈을 돌렸다.


이미 어스름이 짙게 깔리기 시작한 데다 골목 안쪽 길에는 가로등도 없었다. 알아보기 힘든 형체 둘이 보였다. 옥신각신 남자와 여자가 다투고 있었다. 박 팀장은 제법 굵은 전봇대 뒤로 몸을 숨겼다.


“자꾸 이러지 마세요.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잖아요.”

“아니, 그러지 말고, 그냥 밥 한번 같이 먹자는 건데.”

“이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서장님 피아노 레슨도 이제 그만할래요.”

“어허, 이봐요! 한 선생님. 저기, 잠깐만!”


피아노 학원 여선생이 탁,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골목에 혼자 남은 경찰서장은 휴 한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박 팀장은 다시 큰길로 나와 빠른 속도로 걸어서 마침 문을 연 순댓국집으로 들어섰다.


국밥보다 먼저 나온 소주병을 따서 한 잔 마시고, 박 팀장은 핸드폰을 열어 메신저를 켰다. 며칠 전까지 근무하던 지방청의 감사담당관실 후배 번호를 찾았다. “여기 경찰서장 놈, 신상 좀 들춰봐. 도박 관련해서 사고 치거나 징계 먹은 거 혹시 있는지, 결혼상태는 어떤지 포함해서.”


전화기를 닫으려다 말고 사진첩을 열었다.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간 8살 아들은 아빠가 사준 권총 장난감을 들고 해맑게 웃고 있었다. 한동안 아들 사진 몇 장으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박 팀장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뚝배기에 후추와 들깻가루를 듬뿍 넣었다. 그리고는 소주잔을 채웠다.


원룸 현관 도어록 버튼. 아들 생일을 누르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네, 형. 거기 서장, 경간부 출신이고, 시험 승진으로 경감, 경정 뚫었네요. 총경 임용되고 첫 발령지는 경기지방청이었고요. 도박으로 사고 친 이력은 없네요. 뭐 사고 쳤으면 그 나이에 총경 달지도 못했겠지만. 이혼했네요. 자식은 없고. 그리고 재산신고 내역을 보니까... 캬... 돈 많네. 부모한테 물려받은 재산이 상당해요. 그리곤, 뭐 특별히 문제 되는 건 없는데요.”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아래 서자, 방금 마신 소주 속 알코올 방울들이 모세혈관을 타고 온몸 구석으로 퍼지는 느낌이었다. 노곤해진 몸을 침대에 던지니, 낮 동안 만났던 장면들 몇이 슬라이드처럼 감은 눈꺼풀 아래로 쓱쓱 지나갔다. 물에 빠진 선장의 시신, 황포돛배, 흰옷을 입은 피아노 여선생, 육개장 그릇 속의 고사리, 천칠백만 원을 하룻밤에 잃은 경찰서장의 너스레, 피아노 여선생에게 추근대던 경찰서장, 그리고 세상 내 유일한 사랑, 준철아.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박 팀장은 잠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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