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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May 16. 2022

하늘호에서 만난 여인

[소설] 가브리엘의 오보에 - 4화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아래 서자, 방금 마신 소주 속 알코올 방울들이 모세혈관을 타고 온몸 구석으로 퍼지는 느낌이었다. 노곤해진 몸을 침대에 던지니, 낮 동안 만났던 장면들 몇이 슬라이드처럼 감은 눈꺼풀 아래로 쓱쓱 지나갔다. 물에 빠진 선장의 시신, 황포돛배, 흰옷을 입은 피아노 여선생, 육개장 그릇 속의 고사리, 천칠백만 원을 하룻밤에 잃은 경찰서장의 너스레, 피아노 여선생에게 추근대던 경찰서장, 그리고 세상 내 유일한 사랑, 준철아.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박 팀장은 잠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며칠 맑았던 하늘이 못마땅했던지, 아침부터 짙고 낮게 내려앉은 구름의 주름은 깊고 진했다. 운산경찰서로 전입된 지 4일째, 형사2팀장 박원석은 전날 익사체로 발견된 하늘호 선장 안칠성의 기록을 훑어보고 있었다. 가족과 연락을 끊고 혼자 사는 67세 홀아비에게는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강 건너 하늘섬을 오전과 오후 각각 1번씩 왕복하는 하늘호가 그의 일터였다. 하루 4번 황포 돛을 단 소형 동력선을 운전하며 근근이 먹고살았던 선장의 주변은 깨끗했다. 딱히 누군가의 원한을 살 만한 사정도, 누군가가 노릴 정도의 돈도 없었다. 죽임을 당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버릴 까닭도 없어 보였다.


싸구려 믹스 커피가 든 종이컵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최 경장이 말을 걸어왔다. “부검 결과 나왔습니다. 팀장님.”


대답 대신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가며 박 팀장은 최 경장을 쳐다보았다.


“익사랍니다. 타살 의심 소견은 없습니다. 실족했거나 자살이거나... 그리고... 혈액에서 알코올이랑 졸피뎀이 검출되었는데.”

“졸피뎀? 수면제?”

“네. 그런데 원래 고인이 평소 병원 처방받아 먹던 거랍니다.”


“수면제를 먹었으면 그냥 이불 덮고 잠이나 기다릴 것이지, 강가엔 왜 나간 거야?”

“이웃들 말로는, 평상시 습관이었다네요. 사는 집이 선착장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데, 밤에 자기 전에 거의 매일 강가를 산책하곤 했답니다. 사고가 난 그저께 밤에도 혼자 집을 나서는 모습이 근처 CCTV에 잡혔습니다.”

“강가나 선착장 부근 CCTV는?”

“선착장에 딱 하나 있긴 한데, 그 시간에 거기에 찍힌 건 없답니다.”


어제 점심시간 육개장집에서 엿들었던 경찰서장 일행의 대화를 떠올렸다. 고스톱으로 하룻밤에 천칠백만 원을 잃었다고 자랑하던 서장의 말꼬리에 붙었던, 강 사장이라는 인간의 이야기.

“근데, 칠성이 새끼는 어쩌다가... 선장 월급, 그거 얼마나 한다고, 애초부터 지 주제에 맞게 놀았어야지.”


“채무 관계는?”

“어제 1팀에서 선장 집을 뒤져 봤는데, 그런 쪽으로도 뭐 나온 건 없다는데요. 금융거래 이력도 특별한 건 없고.”

“개인 간 빚이라면 나올 게 없겠지. 빌려 쓰고 못 갚은 사람은 차용증 같은 거 보관 잘 안 해. 그런데... 선장, 혹시 도박 좋아했나?”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박 팀장은 최 경장의 얼굴을 스치며 지나간 놀라는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아... 그... 네. 그렇긴 했다고 합니다. 평소 도박을 즐겼다는 소문이.”


‘시골 경찰서로 내려온 지 고작 나흘밖에 안 된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최 경장의 당황한 눈빛이 그의 속내를 자백하고 있었다. 그 눈빛을 박 팀장은 읽었다.


‘이 놈은 알고 있는 걸 전부 다 말하지는 않고 있다.’ 박 팀장은 지역 토박이인 부사수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는 결론에 빨리 이르렀다.


“여기 하우스 있지?”

“네?”

“하우스 몰라? 사설 도박장 말야.”

“아.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박 팀장은 재킷을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좀 나갔다 올게. 도박이나 채무 관련해서 고인 주변 좀 알아봐.”


하늘섬으로 건너가는 배, 하늘호의 시동이 걸려 있었다. 차 안의 시계는 9시 53분. 색이 바래져 알아보기도 힘든 페인트칠 간판에는, “배 출발 시각 : 매일 오전 10시, 오후 4시”라고 적혀 있었다. 차에서 내린 박 팀장은 지갑을 꺼내 뱃삯을 치르고 곧장 배에 올랐다. 배 안에는 열 명 정도가 타고 있었다. 대부분 하늘섬에 사는 노인들이거나, 그들을 찾는 친인척인 것 같았다. 검은 옷을 단정히 챙겨 입은 저 두 명은, 아마도 묘지를 찾는 유족이겠지.


티가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천천히 탑승객들의 면면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이 박 팀장 눈에 띄었다. 구석 맨 뒤 뱃전에 비스듬하게 기댄 채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바로 어제, 강둑에서 읍내에서 두 번 봤던 여인이었다. 성이 한 씨라고 했던가?


아직 통성명도 안 한 그 여자가 박 팀장은 묘하게 반가웠다. 피아노 학원 여선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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