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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May 17. 2022

가브리엘의 오보에

[소설] 가브리엘의 오보에 - 5화

티가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천천히 탑승객들의 면면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이 박 팀장 눈에 띄었다. 구석 맨 뒤 뱃전에 비스듬하게 기댄 채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바로 어제, 강둑에서 읍내에서 두 번 봤던 여인이었다. 성이 한 씨라고 했던가?


아직 통성명도 안 한 그 여자가 박 팀장은 묘하게 반가웠다. 피아노 학원 여선생이었다.


오늘은 흰옷이 아니었다. 잔뜩 흐린 날씨에 화답이라도 하듯 구름 색을 닮은 원피스 차림 여자의 손에는 어제 봤던 그 가방이 들려 있었다. 피리... 오보에가 든 가방. 몇 명 살지도 않는 외딴섬에 오보에는 어디다 쓰려고 들고 가는 걸까? 출장 레슨?


여자는 줄곧 강물을 굽어보고 있었다. 박 팀장은 여자의 옆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일부러 염색하지 않으면 나오기 힘들어 보일 정도로 새카만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며 여자의 뺨을 쓰다듬었다. 어제보다 가까이서 보니, 상당한 미모였다. 뭔가 깊이 생각에 잠긴 듯한 눈매는 조금 날카롭기는 했지만 아름다웠다. 굳게 다문 입술은 나름 만만치 않은 고집을 매혹과 함께 뿜어내고 있었다. 돈 많은 도박쟁이 서장 놈이 쫓아다니고도 남을 정도로 빼어난 외모에는, 그러나 뭔지 모를 슬픔이 묻어 있었다. 창백한 얼굴과 까만 머리칼의 대조가 그런 분위기를 더 진하게 연출했다.


황포돛배는 생각보다 느렸다. 얼마 거리가 안 되는 것 같은 섬에 도착한 것은 10시 30분. “자. 두고 가시는 물건 없나 잘 보시고요. 내리실 때 발 조심하세요. 11시 반에 출발합니다.”


일부러 맨 마지막에 배에서 내리면서, 박 팀장은 새로 온 선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수고하셨습니다. 새로 오신 분인가 봐요?”

“아녜요. 전 그냥 잠깐 대타요. 대타. 새로 사람 구해질 때까지만 모는 거예요. 근데 빨리 구해질지 모르겠네요. 이거 뭐, 시골인 데다가, 돈도 얼마 못 받는 자리라... 에이, 누가 오려고나 하겠어요?” 섬 선착장에 배를 묶은 밧줄을 발로 툭툭 치며 임시 선장이 투덜거렸다.


선착장을 빠져나와 한 30여 미터를 걷자 갈림길이 나왔다. 승객들 모두 왼쪽으로 난 길로 접어들었다. 섬 왼쪽이 마을이라고, 어제 최 경장이 그랬었지. 검은 옷을 단정하게 입었길래 공동묘지에 가는 줄로만 알았던 두 명도 왼쪽 길로 빠져나갔다. 박 팀장은 공동묘지로 향한다는 오른쪽 길로 눈을 돌렸다. 오보에 가방을 든 피아노 여선생이 천천히 혼자 걷고 있었다.


스무 발자국 이상 거리를 두고, 박 팀장은 여자의 뒤를 따라갔다. 애초 하늘호를 탄 것은 죽은 선장에 관해 뭐라도 건질 게 있을까 싶어 마을로 가려던 목적이었지만, 박 팀장은 생각을 고쳤다. 다행히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서 여자는 공동묘지를 향하는 언덕을 올라갔다.


언덕 초입부터는 숲이 울창했다. 좌우로 나무들이 무성하게 우거진 언덕길은 심심하지 않게 구불거리고 있었다. 자연 그대로가 엄폐물인 덕분에 앞서 걷는 여선생은 전혀 미행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늘은 흐렸지만 섬은 맑았다. 태어나서 지금껏 마셔본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공기였다. 건강한 자연식에 더해진 산뜻한 고명 같은 산새 지저귐은 더없이 청아했다. 산 공기는 폐에, 새소리는 귀에 담으며 박 팀장은 기분 좋은 산길을 걸어 올랐다. 공기 냄새와 새 노래에 심취한 탓에 박 팀장의 발걸음은 게을러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앞서 걷던 여자의 뒷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놓친 건가. 슬쩍 당황하며 공동묘지 초입으로 들어서는 박 팀장의 발이 멈췄다. 소리다.


음악 소리. 피리 소리. 퍽 오랜만에 듣는 멜로디.


<가브리엘의 오보에>


https://youtu.be/lArnKBTe82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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