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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May 18. 2022

묘비석 앞 오보에 향기

[소설] 가브리엘의 오보에 - 6화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앞서 걷던 여자의 뒷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놓친 건가. 슬쩍 당황하며 공동묘지 초입으로 들어서는 박 팀장의 발이 멈췄다. 소리다.


음악 소리. 피리 소리. 퍽 오랜만에 듣는 멜로디.


<가브리엘의 오보에>


......


피리 소리는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아니다. 허공을 달리는 바람 위에 앉아 다가온 것은, 피리 소리가 아니라, 향기였다. 음악, 피리 소리가, 소리가 아니라 향기였다는 것을, 박 팀장은 처음 깨달았다.


선율은 북받치는 슬픔의 파동이었다. 그리고 파동의 끝은, 언젠가 어디선가 삶에 스몄다가 이제는 심장에 고여 잠든 어떤 기쁨의 기억을 깨우고 있었다. 그렇게 지금의 슬픔과 아득한 기쁨을 만나게 하는 향기로운 파장이 박 팀장의 온몸을 휘감았다.


시간이 멈추고, 지구도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멎어버린 시간 속, 자전(自轉)을 그친 지구의 껍데기 어디쯤, 여기 섬 묘지에 볼록 솟아난 야트막한 봉분들을 피리 소리가 어루만지고 있었다. 오보에 향기가, 삶의 기억을 안고 잠든 죽음들을 가만가만 토닥이고 있었다.


잔잔히 사방으로, 하늘섬을 쓰다듬는 향기가 그 여운을 흘리면서, 오보에 연주가 끝났다. 그제야 박 팀장은 알게 되었다. 두 아름은 족히 넘는 플라타너스 밑동에 기댄 채로, 향기가 된 선율에 젖었던 것은 그의 마음만이 아니었다. 왠지 멋쩍은 기분으로, 촉촉해진 두 눈가를 주먹으로 훔쳐내고, 박 팀장은 구름 색 원피스 여인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오보에 연주를 마친 여선생은 풀밭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가방을 열고 오보에를 넣고 그녀가 뭔가를 꺼냈다. 흰 수건이었다. 여자는 바로 앞의 묘비석을 정성스레 꼼꼼히 닦아주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무덤 앞에 앉아서 언덕 아래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가끔 고개를 들어 먹구름에 잠긴 하늘을 응시하기도 했다.


30분쯤 지나자, 여자는 오보에와 수건이 든 가방을 들고 무덤 앞에서 일어났다. 여인이 언덕 아래로 뻗은 울창한 숲길 사이로 사라지자, 박 팀장은 여인이 앉아 있던 무덤 앞으로 내려갔다. 피아노 여선생이 수건으로 어루만졌던 그 묘비석에 새겨진 글자.


한여울 2013. 9. 28.~2021. 4. 6.


핸드폰 카메라를 켜다 말고, 박 팀장은 메모장을 열었다. 묘비석의 이름을 촬영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너무도 빨리 하늘 소풍을 떠난, 아마도 피아노 여선생의 딸로 보이는 아이의 이름과 생몰 월일을 기록하고, 박 팀장은 여인이 걸어 내려간 길을 따라 선착장으로 향했다.


회색 하늘이 꾸무럭거리며 구름 사이 주름들을 접었다 펴고 있었다. 참고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려는 신호 같았다. 우산을 안 챙겨 왔는데, 차에 우산이 있던가? 강가로 돌아가는 배 안, 여인이 앉은 자리 대각선 맞은편 자리에 앉은 박 팀장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전 부인의 문자 메시지였다.

“어제 보낸다고 하지 않았어? 왜 아직도 돈 안 보내?”


아차. 아들 책값과 밥값 보내는 걸 또 깜빡했다. 그래도 잘못은 했지만, 이 여편네한테 굽실하고 싶지는 전혀 않았다. 일부러 퉁명스럽게 답장을 보냈다.


“바빠서 그랬다. 지금 송금한다. 어제도 말했지만, 준철이 있을 때는 집에 남자 들이지 마! 시집 새로 가려거든 준철이 나한테 먼저 보내라!”


돈을 보내자마자 가시 돋친 전처의 답장이 도착했다.

“헛소리 좀 집어치워! 당신이 상관할 일 아니야! 준철이 얘기, 이제 제발 그만해! 앞으로는 약속한 날짜에 맞춰서 돈 보내! 나도 너랑 한마디도 섞기 싫으니까!”


강가, 선착장에서 좀 떨어진 주차장에 세워둔 피아노 여선생의 차는 검은색 경차였다. 세단이나 SUV가 아닌, 경차가 검은색인 건 처음 보는데? 음악은 전문이어도, 미술 감각은 영 아닌가 보다, 생각하며 박 팀장도 자신의 차에 올랐다. 아까 최 경장이 여기서 5분 거리랬지, 아마? 죽은 선장의 집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하고, 박 팀장은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었다.


지은 지 적어도 30년은 넘은 듯한 3층 연립주택의 외벽은 성한 곳이 없었다. 번개 모양으로 곳곳이 갈라진 벽 틈마다 임시변통으로 발라놓은 시멘트마저도, 색이 바래지다 못해 사라지고 있었다. 익사체로 발견된 하늘호 선장의 집은 305호. 계단을 오르자 쥐 오줌 썩는 냄새가 코를 괴롭혔다. 컴컴한 계단을 올라 2층을 지나치려는데, 누군가 먹고 내놓은 짬뽕 그릇이 발에 부딪쳤다. 쉰 건지 썩은 건지 고약한 냄새의 짬뽕 국물이 구두에 튀자, 박 팀장은 낮게 욕설을 뱉었다. 3층으로 올라선 박 팀장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사무실에서 챙겨 온 선장 집 열쇠를 꺼내려다 박 팀장은 멈칫했다. 잠겨 있어야 할 선장 집 현관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곤두서려는 신경을 가라앉히며, 박 팀장은 온몸의 근육을 가볍게 긴장시켰다. 숨소리와 발소리를 죽이면서 열린 현관문 틈으로 집안을 들여다보다가,


쿵! 눈앞에 번쩍이는 번갯불을 미처 느끼기도 전에, 박 팀장은 계단 아래로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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