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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May 24. 2022

소금 = 덫

[소설] 가브리엘의 오보에 - 9화

“드라이버, 어디 있을 거야. 찾아와.”

선장 아들이 공구함을 여는 동안 박 팀장은 거실 테이블 위에 올라섰다. 천장 여기저기를 손으로 두드리던 박 팀장이 안현태에게서 건네받은 드라이버로 천장 석고 텍스를 뜯었다. 네 귀퉁이 중에 세 번째 나사를 풀자, 솜처럼 뭉친 먼지 덩이와 함께 툭.


나무 상자가 아래로 떨어졌다.


선장 아들이 거실 바닥에 떨어진 나무 상자와 박 팀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만들어진 지 족히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조그만 갈색 나무 상자였다. 박 팀장의 눈은 먹잇감을 발견한 짐승처럼 빛나고 있었다. “열어봐.” 박 팀장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선장 아들 안현태는 그제야 상자 뚜껑을 열었다.


원래는 흰색이었을, 이제는 누렇게 변해버린 천으로 된 작은 주머니가 맨 위에 있었다. 입구를 조인 끈을 풀자, 금반지 두 개가 나왔다. 같은 모양, 다른 크기. “결혼반지네.”


그 아래에는 계산기와 볼펜이 있었다. 상자 맨바닥에 놓인 두툼한 수첩은 박 팀장이 꺼냈다. 꼼꼼하게 날짜별로 정리된 도박 장부 페이지를 수놓은 안칠성 선장의 글씨는 깜짝 놀랄 정도의 명필이었다. 활자 인쇄라고 해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또박또박한 정자체로 그날그날 매일의 수입과 지출이 기록되어 있었다. 첫 장의 날짜는 2년 전. 처음 몇 달간의 숫자에서는 소금 냄새가 물씬 났다. “시작은 꽤 짭짤했어. 소금이 덫인 게야. 소금에 절인 생선은 미끼야.” 박 팀장의 말에 선장 아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수첩 맨 마지막 페이지의 날짜는 선장이 시신으로 발견되기 3일 전이었다. 마이너스 7천5백8십2만 원. 그다음, 그다음, 계속 비어 있는 페이지를 타라락 넘기자 수첩 맨 마지막 장에서, 다시 선장의 필체가 등장했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글씨에서는 섬뜩함이 돋아났다.


“나 안칠성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만약 내가 시체가 된다면, 그건 누가 나를 죽였다는 거다. 윤치범.”


“이거, 수첩, 가져간다. 나중에 돌려줄게. 아까 그 통화 녹음 파일, 나한테 꼭 보내고. 니 전화번호도 나한테 문자 남겨. 네 아버지 죽인 새끼, 내가 꼭 잡아 줄게. 먼저 간다. 전화하면 받아.”


“윤치범이 누구예요?” 서둘러 선장 집을 나서는 박 팀장을 향해 안현태가 물었다. 고개를 돌리며 박 팀장은 차가운 웃음을 입가에 흘렸다. “여기 경찰서장님 존함이시다. 윤, 치 자, 범 자.”


왠지 모를 흥에 겨워 경쾌하게 액셀을 밟던 박 팀장의 배가 꼬르륵 하소연했다. 시계를 보았다. 오후 1시 5분. 길 오른쪽에 편의점 하나가 보이자, 박 팀장은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컵라면이 익기를 초조히 기다리며 박 팀장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여기서는 해결 못 한다. 지방청으로 던지자. 하지만 아직 증거가 부족하다. 장부랑 유서만으로는 답이 희미하다. 좀 더 필요해.


후룩 한 젓가락을 씹으며 편의점 창밖 도로를 향해 눈을 돌리니,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비가 아스팔트를 듬뿍 적시고 있었다. 그러다 불과 몇 초 만에 사정없이 굵어진 빗발은 요란한 소나기로 모습을 바꿨다. 삼키듯 컵라면 한 사발을 비운 박 팀장은 차에 우산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 비닐우산들이 놓인 편의점 쪽문 쪽을 향해 발길을 꺾었다.


편의점 쪽문 건너 맞은편은 시골 룸살롱들이 줄지어 선 유흥 골목이었다. 다닥다닥 붙은 오래된 벽돌 건물 입구의 차양이 꽤 길었다. 그 아래에 왠지 낯익은 뒷모습의 남자가 등을 진 채 서 있고, 그 앞에는 뱀, 사슴, 용, 호랑이... 목과 팔뚝에 동물원 풍경을 알록달록 새긴 덩어리 사내 셋이 고개를 숙인 채 얌전했다. 뭔가를 훈계라도 하는 듯, 덩어리 건달 세 명에게 소리를 지르는 남자의 목소리는 빗줄기에 막혀 들리지 않았다. 그 낯익은 뒷모습이 누구인지를 박 팀장이 알아차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갑자기 최 경장이, 자기 앞에 다소곳이 선 문신 덩어리 셋의 따귀를 차례차례 사정없이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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