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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Mar 11. 2024

우중(雨重), 비는 무겁다.

2022년 어느 여름날의 생각

비는 무겁다.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걷다 보면, 비의 무게를 비로소 알게 된다. 흠뻑 젖은 옷에 달라붙은 빗방울들은 섬유를 관통하여 피부를 덮는다. 숨이라는 것은 단지 코로만, 목으로만 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우산 없이 비를 맞을 때다. 땀구멍을 막는 빗물은, 그래서, (자신을 낳았던 구름의 의도와는 다르게도) 한 생명의 숨을 틀어막기도 한다. 화단의 꽃과 마당의 풀들에게는 생명수인 비가, 누군가에게는 호흡을 가로막는 질식의 망토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는 무겁다.


장마 시작을 여는 빗줄기가 잔뜩 무겁던 토요일 오후, 어디선가 나타난 길고양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오물조물 꼼지락, 아직 세상이 낯설기만 할 아깽이 셋은 졸졸졸졸 어미 꼬리에 찰싹 붙어 아장아장 걸음마를 익혀가는 중이었다. 시골집 마당에 놓인 평상 위, 처마 밑에서 네 마리 고양이 모자녀(母子女)들은 그렇게 굵은 빗발을 피해 젖은 몸을 말리고 있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툇마루를 지나 마당으로 나오던 시골집 주인 남자는 대뜸 화부터 났다. 간밤에 평상 위 돗자리를 엉망으로 만든 범인들의 자진 출두는 ‘순진함’이 아닌 ‘약 올림’이라고 남자는 단정했다. 마침 남자의 손 닿는 곳에는 빗자루가 있었다. 제 화를 못 이긴 남자의 버럭 고함에 놀란 고양이들은 남자가 빗자루를 쥐기 전에 이미 후다닥 달아났다.


흐트러진 평상 돗자리 위 흙덩이를 빗자루로 쓸어 담던 남자의 눈에 한참 썩어가는 생선 대가리 토막이 들어왔다. 어지러울 정도의 악취에 코를 감싸 쥐며 썩은 생선 대가리를 치우다가, 남자는 더욱 화가 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골목 어귀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찢고 건져왔을 썩은 생선 대가리는 어미 자신의 주림을 달래기 위함이 아니리라. 제 새끼들이 물 젖이 마르지 않도록 뭔가라도 먹어야 하는 본능의 모성, 모성의 본능은 썩은 생선 대가리보다 더 참혹하고 절실하게 다가왔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기억이 떠오르려는 것을 고개 흔들어 떨쳐버린 남자는 담배를 끄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비가 잠시 그치고 어스름이 내려앉을 무렵, 갑자기 궁금해진 남자가 마당으로 향하는 툇마루 미닫이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언제 다시 돌아왔는지, 고양이 모자녀(母子女) 넷이 평상 돗자리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땅거미 사이로 보였다. 아까와는 달리 남자는 천천히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가 그네들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이번에는 고양이들도 도망가지 않았다. 평상을 향해 네댓 걸음을 옮기는 동안 남자의 눈이 어둠에 적응하고, 그제야 아가 고양이들의 허겁지겁 저녁 식사 모습이 드러났다. 어미 품을 파고들어 젖을 문 아깽이들의 자그만 몸뚱이와 다리들이 꼬물꼬물 파닥파닥, 말 그대로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는 중이었다.


그때 남자의 눈과 어미 고양이의 눈이 마주쳤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어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남자의 발이 멈칫 멈추었다. 사람이 아닌 것의 눈빛이 말을 한다는 것을, 남자는 이날 처음 알았다. 남자를 보고도 달아나지 않는 어미 고양이는 눈으로 심정을 토하고 있었다. 말을 할 줄 모르기에 그저 낮고 무겁게 으릉거리는 미물의 두 눈망울은 간곡함이었다. 그냥 간곡함이 아닌 목숨을 건 간절함이었다. ‘더 다가오면 내가 찢기더라도 널 찢어버리겠다.’는 섬뜩하고 처절한 눈빛은 호소하고 있었다. 제발 부탁이야. 아가들 밥 먹고 있잖아. 제발 건드리지 말아 줘.


먼저 발길을 돌린 남자의 고개도 뒤로 돌아갔다. 쳐다보는 것만으로 위협을 느낄 어미 고양이에게서 눈을 떼고, 남자는 마당을 지나 툇마루를 지나 거실로 들어섰다. 한창 둘이서 토닥토닥 노닐던 두 딸아이가 아빠에게 매달렸다. 두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남자는 TV를 켜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의 최신 영상을 찾아 틀었다.


여기도 고양이네. 두 아이가 눈을 떼지 못하고 몰입하는 것은, 고양이 일가족을 받들어 모시는 (요즘 말로) 고양이 집사들이 만들어 올리는 영상물이었다. 살아생전 비 한 방울도 맞지 않고 자랐을 법한 고양이 일가족의 털은 윤기가 좌르르 흘렀다. 보고 있노라면 사람과 고양이 중 누가 주인인지 뒤집혀 인식되는 화면 속, 어여쁜 고양이들은 썩은 생선 대가리라는 것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싶어졌다. 굽신굽신거리는 사람을 제 발톱 아래 심부름꾼으로 여기는 멋쟁이 고양이들. 집사가 부탁하는 설정과 프레임에 맞춰 귀여움과 재롱을 맘껏 뽐내는 고양이들. 그 대가로 적지 않을 광고 수익과 굿즈 판매 수익을 집사에게 안겨주는 고양이들. 자본주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앉은 고양이들아. 너희는 알까. 이 세상에는 썩은 생선 대가리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너희는 알고 있니.


다음날. 잠시 주춤한 비가 남긴 습기로 뒤덮인 한낮, 남자는 긴장하며 카페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처 안장에 엉덩이를 붙이지 못한 채 왼쪽 다리로만 자전거를 지탱하고 있는 노인은 도저히 페달을 밟을 수 없었다. 차도 한가운데 위. 안장 뒤에 족히 2미터는 되는 높이로 쌓인 폐지 더미의 무게는 자전거의 좌우 균형을 잡으며 페달을 밟는 것을 곡예보다 더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할아버지, 그냥 자전거 끌고 가세요. 그 상태로는 절대 페달 못 밟아요. 아니, 할아버지. 끌고 가는 것도 힘들겠어요. 폐지가 너무 많이 실려 있어서...


주문처럼 기도하듯 속으로 외치던 혼잣말이 “헉!” 짧은 비명이 되어 남자의 입 밖으로 나왔다. 폐지 더미의 무게를 못 견딘 자전거는 찻길 위에서 그대로 뒤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넘어진 자전거를 일으키려 안간힘을 쓰던 노인은 이내 포기하고는, 나동그라진 자전거에 매달린 골판지 상자 묶음들을 하나씩 떼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무 로프로 단단히 동여매 둔 폐지 묶음들을 자전거 뒷좌석에서 뜯어내는 것조차 노인 혼자 힘으로는 벅찼다. 카페를 뛰쳐나간 남자가 노인에게 다가갔다. 바로 그때, 낡은 자전거의 고무 로프를 풀고 골판지 상자 묶음들을 들어 인도로 옮기는 노인과 남자 옆으로 B로 시작하는 상표의 외제차 한 대가 짜증처럼 경적을 울리며 빠르게 지나갔다.


비는 무겁다. 비가 무겁다는 사실을 남자는 비로소 알았다. 전날 내린 빗줄기를 듬뿍 머금은 골판지 상자들이 이토록 무거운 줄, 남자는 미처 몰랐었다. 누군가에게는 호흡을 가로막는 질식의 망토가 될 수도 있는 비는, 무겁다. 고양이에게도 사람에게도.


아니 더 정확히는 말이다. 어떤 고양이나 어떤 사람에게는, 비는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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