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의 인생(人生) 수업]
1992년 3월, 고1 교련 첫 수업시간, 선생님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말해보자.”며 한 명씩 차례로 일으켜 세웠다. 사랑, 자유, 평화, 우정... 40여 개 추상어의 잔치가 끝나자, 어릴 적 6.25를 겪었을 머리 희끗한 퇴역 장교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너무도 당연해서 아무도 짐작 못했던 답을 말했다. “바로 목숨이야, 목숨.”
‘목숨의 유통기한’인 삶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잠’ 속의 잠깐 ‘꿈’이다. 무한한 ‘잠’과 달리 그 ‘꿈’은 반드시 시작과 끝이 있지만, 그게 언제인지를 우리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다. 저마다에게 제각각인 빠르기로 머뭇머뭇 혹은 성큼성큼, 1초씩 집어삼키며 죽음은 우리를 향해 가까워지고 있다. 그 다가오는 속도를, 도착하는 시각을 우리가 알지 못할 뿐.
스스로 선택에 의한 임종을 제외하면, 자신이 1분, 아니 1초 뒤에도 살아있을지 장담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일까, 각종 사고로 뜻밖의 마지막을 맞는 사람들의 뉴스를 남일 같지 않게 접할 때면, 북극점을 놓친 나침반처럼 마음이 어지러워진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처럼, 살아보지 않았기에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운 ‘내일’은 숫제 공포에 물든 허무함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에 스민 이치, 반전과 역설은 여기서도 극과 극을 만나게 한다. 끝이 있어 허무하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로 인생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 그 끝이 언제인지를 알 수가 없기에 삶은 우주보다도 무겁고 별보다도 빛난다. 그리고 죽음과 삶이 본디 하나임을 각성하는 순간, 들숨과 날숨이 교차하는 그 사무치는 1초는 억겁의 시간을 이기는 불꽃으로 다시 태어난다.
불꽃같은 삶이 진 2011년 10월, 그가 타계한 다음 날, 전 세계 아침 신문들의 1면 사진은 모두 똑같았다고 한다. 그 아래 한 줄, <Jobs, iSad>. 세상 물줄기의 흐름을 크게 바꾼 거인이 우리에게 선물한 것은 단지 혁신이 녹아든 이기(利器)만이 아니었다. 스티브 잡스가 남긴 빛나는 어록 중에서도 제일 아껴 곱씹게 되는 한마디, “그 여정이 바로 보상이다.”
언제 끝날지 모를 우리네 삶은 곧 ‘순간의 합’이기에, 모든 의미는 결과가 아닌 과정에 있어야 한다. 즐거움도 행복도 결승선에 있는 것이 아니다. 흐르는 땀을 시원하게 식혀주는 바람의 향기도, 극한까지 힘을 펼치는 근육 말단에서 느끼는 고통스러운 쾌감도, 경주로의 끝이 아닌 트랙 바로 위에 있다. 목적지가 아닌 길 위의 여정이 곧 보상이고 선물이며 목적 그 자체다.
자신의 존재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것은 오직 이 ‘순간’뿐이며, (자신을 뺀 모든 것은 타자(他者)이기에) ‘삶’이 존재하는 영역은 ‘자기 자신’뿐이다. 시간과 공간의 교차로에 한 인간이 서 있는 것이고, 그 가장 정밀한 좌표는 ‘순간’의 ‘자기 자신’이다. 그 둘의 교집합에 완전히 몰입하여 즐기는 것이 행복한 여정이라는 것을 잡스는 너무도 잘 알았던 것이다.
결승선에 늦게 들어가거나 못 들어간들 무슨 상관이랴. 지는 게임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거칠게 요동치는 파도도 해변에 이르면 잔물결로 잦아들 듯, 모든 일승일패의 파장은 결국 0으로 수렴한다. 어차피 죽음 앞에서 인간은 예외 없이 모두 패자가 아니던가. 결과의 승패는 덧없다. 인생은 게임. 그 과정을 즐기며 순간에 집중하는 이가 바로 게임의 승자다.
세기의 명연설로 꼽히는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스티브 잡스는 말했다. “오늘을 네 인생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너는 분명 옳은 길을 가는 것이다.” 마지막일 수도 있는 오늘이라는 시간, 그 백지를 빼곡하게 채우는 “그 여정이 바로 보상이다.” 승리도 성공도 ‘지금 여기 1초’에 있는 것. 그렇게 순간을 즐기며 땀 흘리는 불꽃같은 날들은 퍼펙트 데이다. 그리고 삶은 퍼펙트 게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