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모든 걸 파괴하지는 않는다.
3주에 한 번씩 들르는 미용실은 ‘단장’만이 아닌 ‘지움’의 공간이기도 하다. 일요일 미용실은 붐비게 마련. 집중해서 전자책을 읽기에는 시간도 애매하고 매장 안이 어수선하기도 하더라. 그래서 미용실 소파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은 파일들을 지우며 폴더를 정리한다. 짧게는 10분에서 길게는 30분이 넘는 그 대기 시간 동안, 스마트폰은 조금 가벼워진다.
한 달 가까운 시간 사이 쌓인 건 업무상 주고받은 메일함 속 한글 문서와 엑셀·PDF 파일만이 아니다. ‘지움’의 대상은 주로 ‘사진’과 거기에 담긴 소소한 ‘생각과 느낌’들이다. 모 신문 칼럼의 마지막 단락은 되새겨 곱씹어 볼 만하여 캡처해 둔 것이고, 길을 걷다 만난 고양이는 표정이 재밌어서 두 꼬마 녀석 보여주려 찍은 것이다. 구름과 짧은 만남을 뒤로 저 홀로 흘러가는 반달은 (흔하지만) 볼 적마다 가슴을 시리게 하여 모습을 담은 것. 평일에 잠시 들른 시골 주말 별채 빈 마당을 차지한 무단(?) 주차 차량 번호판 사진, 어차피 주중에는 빈집이니 누구든 잠시 세워 두는 건 상관없지만 혹여라도 있을 상황(차가 드나들다 뭐라도 긁을까 봐서)에 대비해 찰칵해 뒀었지. ‘인생은 짧아도 술잔 기울일 시간은 충분하다.’ 지지난 주 수요일에 들렀던 술집 벽에 붙은 문구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찍었던 걸까(생각이 없는 만취 상태였으니 촬영했겠지). 아무튼 남겨 둘 것들보다는 지워 버릴 것들이 대체로 더 많다.
이렇듯 ‘지움’의 시간은 ‘떠올림’의 시간도 된다. 기억의 밭에 미처 뿌리내리지 못한, 마치 연못 위를 떠다니는 물풀 싹과도 같은 일상 속 순간의 작고 가벼운 조각들을 다시 한번, 아니 마지막으로 음미하는 거다. 대개 회상은 짧고, 보존? 삭제? 여부의 판단은 순식간이다.
그런데 어제는 미용실 대기 시간이 꽤 길었다. 예약을 미리 하지 않은 탓에 더욱 그랬다. 가끔 그렇게, 3주 동안 쌓인 사진들을 다 정리하고도 차례가 돌아오지 않을 땐, 손가락을 휙휙 저으며 맨 아래로 스크롤. 옛날 사진들을 꺼내 불러온다.
주기적으로 스마트폰 사진첩을 정리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주 오래전 사진들은 장마 내내 방치한 마당의 잡초처럼 어지럽고 무성하다. 그래서 집중이 더 필요한 작업이다. 도대체 무슨 상황에서, 왜 찍었는지 기억은 가물가물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스마트폰을 2번 교체하는 사이 흐른 9년이란 시간 속, 사진첩 폴더를 채운 3만 장의 사진은 꽤 무거워도, 그에 대한 머릿속 기억은 한 가닥 깃털처럼 가볍기만 하다.
물론, 무덤 건너편까지 영혼에 새겨 데려갈 강렬하고 뜨거운 순간의 포착도 더러는 있다. 오스트리아 어느 시골 마을(할슈타트) 호수 정경이나, 스위스 산골짜기 밤하늘의 별. 큰딸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카메라 플래시를 받는 표정. 둘째의 뒤뚱뒤뚱 첫걸음마.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떠나보낸 화장터 입구에서 바라본 하늘과 거기 중턱에 걸린 낮달.
얼마 되지 않는 이런 순간들의 박제를 제외하고 나면, ‘지움’의 속도에는 거침이 없어야 할 텐데, 정작 그렇지 못하더라. 시선은 멎어 있고 휴지통 아이콘 위 손가락도 멈춘다. 여기가 어디였더라, 언제였더라, 얘는 왜 이 사진에서 나와 함께 웃고 있는 거지? 아니, 근데 이 사람은 또 누구야? 최근의 그것이 아닌 오래된 사진일수록, 기억의 더듬이는 헛다리 짚기를 반복하고 망각이 낳은 호기심은 뇌리 깊숙이 파고 내려간다.
얼마간은 어렴풋이나마 기억이 난다. 그리고 또 다른 얼마간은 결국 떠올려 내지 못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간에, 오랜 사진, 그 대부분은 휴지통으로 들어간다.
분명, 스마트폰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던 바로 그 순간에는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을 그 찰나의 자취들도, 하지만, 오래도록 간직하다 다시 꺼낸 오늘에는 별 특별함도 아쉬움도 없는 것이 된다는 것. 허탈함, 서글픔, 그러나 담담함.
그렇더라. 모두 다는 아니어도, 많은 것이 그러하더라. 지나고 보면 별거 아니게 되더라. 시간 속에 녹이 스는 것이 추억인지, 자신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몰라도. 그때 그 순간의 애틋함과 절실함은 시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더라.
저기요, 손님!
스마트폰 화면에 코를 박은 손님을, 미용사가 불러 생각의 늪에서 끄집어낸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이쪽으로 앉으실까요? 이제 ‘지움’의 의식은 3주 후를 기약하고.
의자에 앉아 바로 앞의 거울을 노려본다. ‘지움’과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느낌인 ‘잘라냄’의 시간이 왔다. 3주에 한 번 맞는 이 순간마다, 거울을 보면서 주문(呪文)처럼 속으로 되뇌곤 한다.
남루(襤褸)를 입은 제자리걸음이
흩어버린 날들 속,
그래도
이렇게 키워 자라게 한 것 있어,
그 3주, 3시, 3끼
헛되지만은 않았나.
누추한 번뇌와
초라한 절망아.
그 꼭대기로 밀려났기를.
부디.
잘 가라.
싹둑.
‘잘라냄’이 ‘지움’보다 더 잔인한 것일까, 라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있음’을 ‘없음’으로 만드는 것(지움)과 ‘원래 가까이 붙어있던 것에서 강제로 떼어내어 분리’한다는 것(잘라냄). 그런데 어차피 둘은 같은 것. 둘 다 시간 속에 담겨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녹이 슬어간다는 것. 머리카락도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가, 이제는 없는 편이 더 좋은 것으로 전락해 가는 것. 하지만.
'자라남'은 잘못 아닌데
'자라고 남음'이 무슨 죄라고.
한 뿌리에서
네 아래로 생겨나 기뻤을
한 몸과의
예정됐던 작별
아프겠지만,
삶을 허락받은 모두가
다 그러하니
혼자 슬플 일 아니야.
...... 잘 가라. 어쩌면.
다른 모습으로 다시 만날 거야.
안녕.
더는 내 것일 수 없는, 내 것이었던 것아.
커트비가 2천 원 올랐어요. 괜찮으시죠?(5년 단골아, 설마 2천 원 때문에 다른 가게로 가지는 않을 거지?) 미용실 종업원의 겉(속)목소리를 뒤로 하고 미용실 문을 나선다. 시간의 흐름이 ‘지우고’ ‘잘라내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 ‘생겨나’ ‘덧붙여진’ 2천 원만큼 더 단정해졌기를 바라며 집으로 향한다.
이발도 마친 일요일 오후, 미처 다 못한 이삿짐 정리. 몇 벌 되지는 않는 옷들을 가려낸다. 사진도 ‘지운’ 김에, 머리카락도 ‘잘라낸’ 김에, 그 기세로 지난주에는 발휘하지 못했던 과감함을 장착하기로 한다. 1벌당 5초 이내 판단. 남길 것과 버릴 것. 한 시간 남짓 작업 끝에 남길 옷이 절반으로 줄었다. 딱 한 벌만 남겨놓은 채.
물끄러미 내려본다. 군청색 재킷.
시선도 시간도 잠시 멎는다.
다시 옷걸이 걸어 옷장에 넣는다. 군청색 재킷.
어머니가 실종되던 날에, 입고 있던 군청색 재킷. 9년 전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걸치지 않았던, 앞으로도 다시는 입지 않을 군청색 재킷.
시간을 모든 걸 파괴한다.
아니,
시간은 모든 걸 파괴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