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사면 소유리, 상호리 금광의 흔적
여주의 나루터를 공부하러 이포나루터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포나루는 조선시대 한강의 4대 나루터였으니, 이포가 얼마나 번성한 곳이었는지 그 흔적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하러 나온 어르신께서 이포가 진짜로 잘 나가던 시기는 금광이 있던 시기라며 금광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금사면 금광은 한때 남북 모두 합해서 4대 금광에 들어갈 정도로 규모가 컸다는 마을 주민의 증언도 있다고 합니다. 정확한 자료가 없어 확인할 길은 없지만, 크고 유명한 광산은 다 강원도나 북한에 있는 걸로 알았던 제게 그 이야기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우리나라에 금광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일제 강점기인데요. 우리의 예상과 달리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금 보유국이었다고 합니다. 1939년 한반도의 금 생산량은 연간 31t을 기록해 세계 5위였는데, 금광은 주로 북한 지역에 분포해 있었지만, 남한에도 제법 규모가 큰 금광이 있었다고 합니다. 정선 화암동굴은 연간 30킬로, 충남 청양 구봉동굴에서는 매달 60킬로의 금이 나왔다고 하니. 조선에 금이 안 나는 곳이 없다 할 정도로 금광 열풍이 불 수밖에요.
1930년대에는 전쟁을 준비하는 일본의 금에 대한 수요가 폭발하면서 그 여파로 일명 우리나라의 ‘황금광’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광산업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생기자 이젠 너도나도 금광 개발에 뛰어들게 되었고, 전국 곳곳에 광산이 개발되었지요. 금광에 대한 과열된 분위기를 가리켜 당시 신문에서는 황금에 미친 ‘황금광(黃金狂)시대’라 칭했다고 합니다.
여주도 그런 황금광시대에 개발된 광산의 흔적들이 아직 남아있는데, 바로 금사면과 북내면 옥녀봉 일대의 광산입니다. 두 군데 모두 일제 강점기 때부터 개발되어 1970년대까지 흥성했던 광산이었다고 합니다.
금광의 흔적을 찾기 위해 금사면 상호리를 찾아갔습니다, 물레방아처럼 물을 이용하여 석금(石金)을 찧는 금방아가 있었다고 알려진 곳을 가보니,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고 당시부터 이용했다는 건물만 외부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근처의 여러 곳에도 광산 관련 시설이 있었다고 알려져 찾아가 봤지만 위치만 확인해 볼 수 있을 뿐 남아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상호리에서 소유리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금광 갱도가 남아있어 직접 갱도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소유리 학생들이 갱도를 통해 건너편 상호리로 통학했다고 하는 데 지금은 막혀서 일부만 갈 수 있습니다. 굴 안에 박쥐가 산다고 해서 위를 유심히 살펴보니 진짜로 박쥐가 있어 신기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