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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눈치 없는 천치 며느리

by Zei
눈치 빠른 며느리는 피곤하다.
감추지 않는 감정은, 순수라 믿었다.


"냉동실에 사골국 있어요!"


그의 엄마가 눈을 가늘게 뜨고 미심쩍은 기색으로 시선을 삐딱하게 흘렸다.

왜일까. 영 못 믿겠다는 얼굴이다.

"진짜 있다고?"


결국 새벽에 친정엄마가 다녀간 일을 고하고 나서야, 이 미친 상황이 정리되었다.

까딱했으면, 시누이의 시어머니가 사다 준 사골로, 내 시어머니가 끓인 사골국을 받아먹을 뻔했다.

이 무슨 주인없는 희극인가.


멋적은 듯, 샐쭉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러곤 꿍꿍이를 덕지덕지 바른 입가를 씰룩이며, 다시 전화기를 손에 들었다.


덩달아 긴장하려던 찰나, 낮은 음색의 아버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뜻 나연이라는 말이 들린 것 같았다.


"오매, 나연이가 쓰러져분줄알고 놀래서 왔는디, 와서 본께 딱! 쓰러지기 직전이구만요. 내가 안왔으믄 큰일날뻔했어라"


그의 엄마는 멀쩡한 며느리가 갖다준 찻물을 호록 들이마셨다.


아버님께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그 며느리’의 병수발이라도 들어줄 것처럼.

앞으로 며칠 치 알리바이 조립에 열중했다.

숨소리는 진짜일까.

난 말 못 하는 장식품처럼 눈만 깜빡였다.

새삼스러울건 없었다.


휴대폰 레더 케이스를 탁 소리 나게 덮는 그의 엄마의 표정이 한결 홀가분해 보였다.

통화를 한게 아니라 뭐라도 싸고 나온 듯한 얼굴이다.


"아, 인자 본께. 얼른 꺼내서 녹여라."

유산한... 다음날이었다.


일어나 냉장고 쪽으로 가려는 시늉쯤은 할 줄 알았다.

그럼 나는 말리는 척을 했을 테고, 결국 내가 상을 차리는 건 예정된 절차처럼 흘러갈 줄 알았지.

하마터면, 실소가 나올 뻔했다.

그래, 여긴 우리 둘뿐이구나.


10시.

배가 고프기는 할 참이다.

매일 7시 반이면 먹는 아침을 오늘은 거르고 왔겠지.

며느리 밥상을 받아야 마땅할 시간이다.

오늘 메뉴는 진하게 우린 사골국이겠거니.

배알이 뒤틀렸다.

왜인지 오늘은 눈치 없는 며느리이고 싶었다.


"저 입맛이 없어요"

순간 그의 엄마의 눈썹이 꿈틀했다.

입맛이 없어도 챙겨먹어야 한다며 얼른 녹여서 먹으라는 그의 엄마에게 다시 고개를 저었다.


"속도 안 좋아서 진짜 못 먹겠어요"


그의 엄마가 아랫입술을 꼭 깨물다 결국 쯧, 혀를 찼다.

가뜩이나 차가운 포세린 타일이 깔린 서늘한 거실에 불편한 정적이 흘렀다.

오늘쯤은 오디오가 빌 틈 없는 살가운 며느리 역할을 내려놓아도 괜찮지 않나.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자니 허리가 뻐근했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도 '들어가서 쉬어라'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눕고싶다는 말이 목구멍을 타고 오르던 찰나.


"거시기... 은희 소식은 들은 거 없고?"


아, 신따위는 역시 없다.


제발 아니길 바랐던 본론이 나왔다.

간절히 빌었던 그 기도는 새벽안개처럼 흩어졌다.

일주일 뒤면 시누이의 둘째 출산예정일이다.

엄마의 마음이야 알겠다.


하지만 팬데믹시기다.

딸네집엔 어린이집을 다니는 어린 손녀가 있고, 특히나 임산부가 있다.

그래서 못 오게 했더니, 기어코 쓰러진 며느리를 만들고야 말았다.


"은희가 절~대 오지 말락하드라?"

"..."


그의 엄마가 날, 가만히 응시했다.

당연히 '그럼 저희 집에 계세요.'가 나올 걸 예상했겠지.


그래, 나는 그런 며느리였다.


누굴 탓하겠나.

이 모든 상황은 내가 이렇게 만든 것이다.


"그래도 어찌케 그라것냐잉?"

"..."


숨이 막혔다.

그의 엄마의 입술이 다시 달싹이려던 찰나.

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그의 엄마가 뻐끔거리며 내 쪽으로 성급히 손을 뻗었다.


인간의 시야각은 220도라 하였던가.

휴대폰 액정에 시선을 고정한 나는 모르는 척 전화를 받으며 일어나 돌아섰다.


"응, 여보. 아... 지금 어머님이랑 있어."

저만치서 휘적거리는 실루엣이 느껴졌다.

어찌나 다급한지, 애처로워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눈치 없는 천치며느리 배역이다.


"아니, 좀 아까 오셨어. 아니 아니, 나도 몰랐지."


쯧.

혓소리와 함께 그의 엄마의 허우적거림이 멎었다.


남편이 전화를 바꾸라고 했다.

평소의 나라면 알아서 없는 핑계도 만들어 그의 엄마를 감쌌을 터였다.

천치 며느리가 건네는 휴대폰을 받아 드는 그의 엄마가 입술을 사리물었다.


여기까지 넘어오는 큰소리가 선명하다.

아, 통화 음질 참 좋네.

아들에게 한바탕 깨진 그의 엄마의 기가 폭삭 죽었다.

"나겸이가 나 그냥 가락한다?"

"어휴... 성질머리 참... 못 말리겠네요."

그의 엄마의 눈에 순간 자막이라도 뜨는 것처럼 마음이 읽혔다.

아,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고도 한참.

의미 없는 대치였을까.

아니면 그저 머무름이었을까.

불편한 시간이 질척거렸다.

그의 엄마는 허옇게 질려가는 며느리를 앞에 두고도 들어가 쉬게 하지 않았다.

아니, 나의 상태가 어떤지 알지도 못했을걸.

그저 관심밖일 뿐이다.


가뜩이나 상태가 안 좋던 허리 디스크 통증이 도졌다.

가끔 몇 마디 대화가 오갔고, 또 정적이 흘렀다.

벌을 서는 기분이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울린 내 전화벨 소리에 그의 엄마가 화들짝 놀란다.

"엄마 갔어?"


남편의 목소리에 그의 엄마가 급히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나가실 준비 중이셔."

"바꿔."


그의 엄마는 말 그대로 쫓겨나다시피 채비를 했다.

짐을 챙기는 손은 요란했지만, 나서는 발걸음은 느리기 짝이 없다.




신발을 신다 말고, 어깨너머로 곁눈질을 흘린다.

도르륵 쏟아지는 원망을 갈무리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참 투명하다.

그래서 난 믿었다.

감추지 못하는 그 철없는 감정에 악의는 없을 거라고.

웃긴다.

과거의 나는, 모지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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