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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시어머니가 들고 온 팥죽

by Zei
나는 제발 잠을 자고 싶었다.
시어머니가 둘이나 왔다.
게다가 팥죽이라니.


그의 엄마가 떠난 뒤,

남편이 다시 확인 전화를 하고서야, 고요가 찾아왔다.


그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많이 놀란 눈치였다.

그동안 그가 알고 있던 모습은 진짜가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내가 중간에서 필터 역할을 해왔다.

아니, 그것도 일부일 뿐이다.

대부분은 내 선에서 삼키고 끝냈다.


그의 엄마의 상식 밖 언행에 면역이 없는 그는, 오늘 더 놀랄 수밖에 없었겠지.


이젠 전화가 와도 받지 말고, 차단하라고 한다.

정 급하면 자기한테 할 테니, 걱정도 말란다.


냉정한 아들의 내침에, 괜히 마음이 약해졌다.

그의 엄마는 여전히 철없는 막내딸 같았다.

악의가 있는 건 아닐 거다.


남편은 유치원생을 가르치듯,

‘안 돼요. 싫어요.’를 내게 가르쳤다.

정 입이 떨어지지 않으면, 자기 핑계를 대라고 했다.


“따라 해 봐. 남편이 안 된대요.”


방패를 하나 얻었다.

조금은 숨이 쉬어졌다.

이번엔 내가 그를 달래는 쪽이었다.

차게 식은 침대에, 이제야 몸을 뉘었다.


기차표라도 끊어 모셔다드릴 걸 그랬다.

몰랑해진 마음에, 쓸데없는 후회가 스며들었다.


그의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기차역에 도착하셨나 보다.

안 받을 수가 있나.


“은희가 나보고 내일 내려가락 한다야.”


아들에게 쫓겨난 그 길로, 근처 딸네 집에 갔던 모양이다.

빈집에 멋대로 가서 전화했다가, 또 된통 혼났겠지.


순해 터진 며느리만 믿고 올라온 게 분명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고집불통인 며느리가 모르쇠로 일관 중이다.


결국 한 수 접은 그의 엄마가, 짠한 목소리를 쥐어짜 내며 물었다.


“나 진짜 내려가리?”

“죄송해요, 어머님. 남편이 화가 너무 나서 제 말도 안 듣네요.”


쯧. 또 그 혓소리다.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뚝 끊어버린다.


방패의 성능을 생각보다 금방 확인해 버렸다.


걱정보단 어쩐지 후련했다.

평화다.



다음 날 오전 7시.

정말이지, 지긋지긋한 모닝콜이 아닐 수 없다.

평소 늦잠을 자는 편은 아니지만,

오늘 같은 날은 조금쯤 게을러지고 싶다.

아직 몸도 마음도 온전하지 않다.


"나연아... 내가 가면 니가 힘들지야?"


솔직히.

고함이라도 치고 싶었다.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려 정수리 언저리에서 쥐어 잡았다.


하나, 둘... 후.

가까스로 평온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어머님 죄송해요. 저 오늘은 좀 쉬고 싶어요."


그의 엄마는 전에 없이 기운 빠진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스스로 한 첫 거절이다.

'싫어요.'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이젠 정말로 평화였다.

오늘은 오전 내내 일어나지 않을 거다.



9시.

그래, 내 기억엔 거의 9시 정각 무렵이었을 거다.

아주 약간 지났거나.


초인종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꿈인가.

차라리 제발 악몽이기를.


월패드 화면에는 두 명의 시어머니가 떠 있었다.

시어머니와 내 시누이의 시어머니.


이 꿈같은 관계의 조합은 정말이지... 거북하다.


"아나, 팥죽이다."


그의 엄마가 사돈의 손을 가리켰다.

마트 가방을 든 사돈어른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무릎 나온 잠옷 차림으로 뒤통수를 쓸어내렸다.

그렇다고 이 꼴이 정돈되지는 않았다.


이 공간에서 편히 숨 쉬는 이는 한 사람뿐이다.

여기가 누구 집인지 모르겠다.


받아 든 노란 가방 속 스텐 통이 아직 뜨겁다.

가방 틈으로 스멀대는 열기에 속이 짓눌렀다.

위가 가늘게 뒤집히는 느낌이었다.




열한 살의 어느 날.

반팔을 입었고, 덜컥거리며 선풍기가 돌았다.

바람을 따라 눅눅한 먹기운이 진득하게 들이마셔졌다.

수돗물 비슷한 휘발성 향이 섞인 먹을 갈고, 또 갈았다.

목덜미가 끈적한 계절이었다.


서예학원에서 팥시루떡을 나눠주셨다.

옆 상가에서 오픈 인사를 왔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소화기계가 약한 편이다.

잘 체해서, 떡 같은 건 잘 먹지 않는다.


게다가 팥이나 콩 종류는 편식했다.

팥시루떡은 떡 중에서도 손이 가지 않던 종류였다.


예의상 한입 맛본 떡이 뜻밖에 맛있었다.

그날따라 몇 조각을 더 먹었고, 탈이 났다.

결국 학원 화장실에서 전부 게워 냈다.


오래된 화장실은 더럽고 습했다.

나프탈렌 냄새와 지린내,

그리고 진한 팥 냄새가 시큼한 토 냄새와 섞였다.

머리카락이 끈적한 뺨에 자꾸 들러붙어, 더 신경질이 났다.


집에 돌아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치 빠른 엄마가 맑은 연포탕 국물에 밥을 말아주셨다.

몇 입 못 먹고 화장실 행이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아삭한 사과로 합의를 봤다.

그마저도 넘기지 못했다.

약국에서 사 온 약도 소용없이 고스란히 반납하고 말았다.


결국 응급실까지 갔다.

밤새 노란 위액만 몇 번을 더 올렸다.


팥시루떡 몇 조각의 대가는 너무 혹독했다.

열한 살 그 여름 이후,

서른이 넘도록 떡과 팥, 사과, 낙지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마흔이 넘은 지금도 떡은 여전히 손이 가지 않는다.

팥 들어간 빵류를 다시 먹기 시작한 것도, 몇 해 되지 않는다.

지금도 팥죽 냄새를 맡으면, 순식간에 입안이 축축해진다.




받아 든 스텐통의 열기에 아찔했다.

가방 틈으로 스며 나오는 단내에 속이 일렁인다.

혀 밑에 쇠 맛이 흥건하게 고였다.


"너 줄라고 팥죽 쑤셨단다."


시누이의 시어머니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바로 알겠다.

포지션이 나와 같구나.


그의 엄마가 사돈을 격의 없이 편히 대하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앞에 앉혀두고 거짓말까지 하는 줄은 몰랐다.


아마 어젯밤 퇴근한 딸에게 또 혼났을 거고, 아침에도 당부했음이 분명하다.

오늘 꼭 내려가라고.

그럼에도 포기가 안 되어 기어이 사돈을 끌어들였겠지.


날 걱정하는 척,

뭐라도 해서 갖다주고 싶다는 이야긴,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부탁을 빙자한 강요는 그의 엄마의 주특기다.

당장 가능한 메뉴 중 팥죽이 결정된 이유 역시 뻔하다.

그의 엄마는 달큰한 팥죽을 좋아한다.


오늘의 방패막이로 대동된 사돈어른은 내 눈치를 살폈다.

누가 봐도 억지로 끌려온 모양새다.

동질감에 마음이 눅눅해졌다.


아들의 단호함에, 그의 엄마에게 났던 화가 잠시 가라앉았었다.

남편 덕에 떠올랐던 측은지심이 다시금 심해로 잠겼다.

가슴에서 쿵, 묵직한 돌덩이 같은 정나미가 떨어졌다.

아무래도 다시 떠오를 일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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