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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골국을 두고 간 엄마, 무례를 들고 온 시엄마.

by Zei
엄마는 새벽에 사골국만 두고 갔다.
몸만 온 시엄마는 사골국을 녹이라 했다.
위로를 가장한 무례는, 대개 준비된 얼굴을 하고 온다.


오늘 새벽.


매일 5시 25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출근하는 남편이 내 이마를 쓰다듬고 나가자마자,

친정엄마가 문 앞에 두고 간 사골국을 들고 들어왔다.


곁에서 돌보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돌아간 엄마의 마음은 어땠으려나.

아마 어제 유산 소식을 듣자마자 준비해서, 밤새 사골을 우려냈으리라.


사위가 집을 비우고, 딸이 잠들기 전을 노리셨겠지.

언제부터 주차장에서 기다리셨을까.

현관 앞에 반듯하게 놓여있던 아이스박스에는, 엄마의 깊은 배려가 묻어있었다.


가슴인지 목구멍인지, 어딘가가 먹먹하게 차올랐다.

꿀꺽, 감정을 삼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기에 오소소 뺨이 날카로워졌다.


한 끼 분량으로 소분된 사골국을 냉동실에 켜켜이 쌓았다.

따로 정리할 필요도 없이 담아 오신 반찬까지 냉장실에 넣고 누웠더니, 잠이 싹 달아나 버렸다.


한참을 끔뻑거리다 스륵.

깊은 잠의 문턱을 막 넘어가던 찰나, 그의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억지로 정신을 끄집어 올리자, 과민하게 머리털이 곤두섰다.


6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나겸이는 출근했지야?"


속삭이듯, 아들의 부재를 확인하자마자 평소의 목청이 곧장 돌아왔다.

피식, 정말이지 아침용 보이스는 아니다.


본인이 전화한 건 말하지 말란다.

'우리 아들이' 싫어할까 봐 걱정은 하면서, 유산한 며느리의 휴식은 안중에도 없는 게지.


거의 매일 통화를 했다.

가끔은 내가 걸기도 했다.

늦잠을 자고 싶은 날, 원치 않는 모닝콜을 받기도 했는데.

오늘은 유독 이르다.


문득 울컥 올라온 그것은 화였을까, 설움이었을까.

몸도 마음도 영 불편한데, 하나 마나 한 소리를 계속 듣는 것도 지쳤고, 무엇보다 너무 졸렸다.


"어머님, 저 쉴게요."


결혼 후 3년 만에, 처음으로 먼저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를 귓등에 대고 들었어도 쓰러졌다고 착각할 법한 상황은 아니었다.


혹시 내가 먼저 전화를 끊어서 오해했다고 한들, 그렇다면 최소한 한 번쯤은 다시 걸어 확인했어야 맞지 않나.


그의 엄마는 우리 집까지 두 시간 반이 걸리는 전라도에서 막 올라온 참이다.

아, 그러고 보니.

그의 엄마가 우리 집 초인종을 직접 누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간은 늘 내가 기차역까지 가서 모셔 왔으니까.


아직 10시도 되기 전이었다.

통화가 끝나자마자 바쁘게 기차를 탔음이 분명한 시간이다.


긴 날숨을 천천히 내보냈다.

잠결에 씩씩한 초인종 소리에 놀라 떠밀려 몸뚱이만 일어났던 참이라, 영 몽롱하다.


후루룩, 찻물을 들이켜는 소리에 이제사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정리되지 않은 집안과 손님 맞을 꼬락서니가 아닌 내 몰골을, 차례로 한 템포 느리게 자각했다.


속마음이 비죽, 나답지 않게 뒤틀렸다.

어쩐지 평소보다 일찍도 깨우더라니... 웬일로 며느리 걱정을 다 하나 했다.


유산한 며느리를 돌볼 명분이 생긴 거다.


올라올 마음은, 아마 엊저녁에 이미 굳혔겠지.

그런데 말도 꺼내기 전에 내가 전화를 끊어버렸다.

오히려 쉬워졌으려나?


아버님이 말리지도 못할 이유를 만들 수 있게 된 거다.

나연이가 쓰러진 것 같다고 큰소리로 부산을 떨며 부랴부랴 나섰을 모습이 어쩐지 눈앞에 그려지는 듯 선명했다.


돌이켜 보면, 그의 엄마에게 내 이름은 부르는 이름이라기보다 핑계로 더 자주 쓰였다.

날 부를 땐 늘 "야"나 "아이!" 같은, 말보다는 소리에 가까운 방식으로 불렀다.


내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남들 앞에서 다정한 시어머니 코스프레를 할 때.

혹은 본인이 불리한 상황에서 대리로 앞세울 핑곗거리가 필요할 때뿐이다.


자꾸만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아서, 멋대로 단정 짓지 않으려 애써 이를 꼭 물었다.


늘 그랬듯, 이번에도 내가 쓰러졌다는 건 핑계였을 거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겠지.

뻔하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였다.

손이나 좀 씻으시지.

버석버석한 내 손을 만지작거리는 부드러운 손의 그 감촉이 유독 불쾌했다.

KTX에서부터 달고 들어왔을 그 득실한 세균들이 내 손으로 옮아 붙을 것만 같았다.


꼼지락대는 그의 엄마의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설마, 정말 그 이유로 나를 핑계 삼은 것만은 절대 아니기를.

믿지도 않는 신에게, 조용히 빌었다.


부디, 이 사람을 진심으로 미워하게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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