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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한 다음 날, 초인종이 울렸다.

by Zei
유산한 다음 날, 초인종이 울렸다.
걱정을 빙자한 침범이었다.
배려 없는 걱정은, 폭력이 된다.


각성은 정말이지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일어났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대하는 이를 마주해 본 적이 없어, 설마 그것이 무시인 줄 몰랐다.


사람을 이토록 미워해 본 적 또한 없었기에, 이 마음이 미움인 줄도 몰랐다.


쌓이고 쌓인 그 사소함들이 꾸역꾸역 차올랐다.

더는 담아둘 공간이 부족해져서야 비로소,

그 감정이 이름을 얻었다.


아, 나는 그의 엄마를 미워하는구나.


분출되지 못한 감정의 퇴적물들이 팽배하는 것인지, 아니면 주체할 수 없는 어떤 호르몬의 노예가 된 것인지는 명확지 않다.


요즘 들어, 수년 전 일들이 마치 유튜브 알고리즘 영상처럼 더 자주, 두서없이 떠오른다.

샤워를 하다가도 그 알고리즘에 낚여 북받쳤다.


살다 보면 매일 새로운 에피소드가 쌓인다.

그땐 그저 피식, 아무렇지도 않았다.


때론 웃음으로 때론 한숨으로 흘려보냈던 것들이 먼지인 줄 알았는데, 보기보다 날카로운 파편이었나 보다.


그 자잘한 파편들이 결집해 가슴속에서 침윤성 암처럼 변해버린 것이 "그날" 이후인 걸 보면, 갱년기만의 문제는 아닐 거다.


최근 들어 나의 어딘가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는 걸 눈치챘다.


E 성향인 나는 친한 이웃이 많다.

언제나 웃으며 돌아서지만 가끔은 와락, 무언가가 쏟아져 나올 때가 있다.

아무도 모르게.


아주 느린 속도로 걷다가 갑자기 끼익-하고 큰 숨이 이상한 템포로 들이쉬어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들숨에, 명치인지 윗가슴인지 경계가 모호한 안쪽 어딘가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3년 전부터는 통증과 갑갑증 때문에 와이어 있는 속옷은 입지 못한다.

유방 초음파와 확대촬영을 해 보았지만, 통증의 원인은 찾지 못했다.


이상하다고 자각하고 보니 이런 지가 상당히 된 것 같았다.


혼자가 될 때면 딸깍, 스위치가 켜졌다.

아니, 스위치가 꺼진 건가?


밀려드는 감정에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뒤틀리며 떨리기도 한다.

몸도 마음도 기복이 심해졌다.

내 안에 켜켜이 쌓여있던 마른 장작 같은 감정에 누군가 파이어 스타터를 던진 것처럼 화르륵.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곪았는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손바닥 뒤집듯 감정이 뒤뚱, 기울어졌던 그날.

그 이유, 그 공기.

그의 엄마가 몰고 들어온 그날의 냄새까지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만큼 모든 신경이 곤두서고 예민한 날이었다.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데 기별도 없이 초인종을 누르고 대뜸 들이쳤던 그날.

유산한 다음 날이었다.


갑작스레 몰아친 그 바람은 조용하지도, 조심스럽지도 않았다.

깨진 이 사이로 들이쉰 겨울 공기처럼 아프게 시렸다.


머리끄덩이를 잡힌 것도 아닐진대 가히 폭력적인 바람이었다.

그의 엄마가 내게 폭언을 했는가 하면, 그건 전혀 아니었다.


단지 내가 얼마나 하찮은 벌레였는지 깨닫게 되었을 뿐.

야속하게도, 깨달음은 참으로 늦었다.


불편한 무릎이 무거워 끙차, 하며 쿵 앉은 그의 엄마의 첫마디가 안부이기는 했다.


"갠찮하냐?"


걱정스러운 듯 그의 엄마의 미간이 좁아진 듯도 했다.

당연히 괜찮을 리가 없었지만,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닌 듯 묻지도 않은 말을 슥, 갖다 붙였다.


"나는야? 니가 딱! 쓰러져 분 줄 알고 놀~래갖고, 급허니 왔시야? 그란디 갠찮함마? 워~미 놀래라"


내가?

머릿속에 여러 물음표가 떠올랐으나, 나는 그 이해할 수 없는 독연을 묵묵히 감상했다.


그의 엄마는 한결같이 연기가 서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꾸준하다.

그래, 오늘의 그 열연에도 나름의 이유야 있겠지.


명연기에 내가 또 속은 줄 아는 그의 엄마는 놀란 척하며 가슴을 퐁퐁 두드려 보지만,

이상하게 그날따라 그 연기에 내 마음이 영 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 또한 1인 관객 역할만 N년차 인지라 기꺼이 속아 넘어가는 연기를 펼쳐 주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예민해졌을까.

오늘만큼은 오전 내내 늦잠을 자고 싶었는데, 방해받아서일까.

온다 간다 말도 없이 누른 초인종에 기분이 상한 건지, 평소답지 않게 속에서 빈정이 상했다.


소리 없는 긴 호흡으로 감정을 추슬렀다.


적당히 찬물 섞은 따뜻한 차를 한잔 내왔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그 온도.

그의 엄마의 취향이다.

손이 퉁퉁 부어서 둔탁한 느낌에, 찻잔 하나 집는 데도 꽤나 힘이 들어갔다.


"오매, 앉아있제는~"


내가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동안엔 모른 척 앉아 있더니.

들고 나온 찻잔을 받아 들며 한마디 얹는 그의 엄마는 제법 걱정스러운 안색을 띠고 있었다.

찻물을 후룩거리며 그의 엄마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예. 사돈."


숨길 수 없는 한숨이 났다.

그 사돈은 '내 남편의 누나이자 내 시누이의' 시어머니다.

사실은 생판 남이란 소리다.


"아 거시기, 나 부탁잔 합시다.

여기 나겸이네인디요... 예, 인자 왔어요.

예.. 예... 하하 그란께요.

예 그란디... 거시기, 죄송하지만 나 여기로 사골 쪼까 사다주쑈"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양손을 빠르게 가로저으며 거부 의사를 보였다.


나를 힐끗 일별 한 그의 엄마는 무심히 말을 이었다.


"나연이 사골이라도 끓여줄란디, 내가 무릎이 이란께요? 예...예, 고맙소잉"


지난 모든 시간들에 대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시누이와 사돈어른이 가까이 사는 이곳으로 이사 오지 말 걸.

그의 엄마와 사돈어른이 우리 집에 편히 다니시게 하지 말걸.


결국 난 목소리를 내어,

그의 엄마의 말허리를 끊고 파고들었다.


"냉동실에 사골국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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