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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븐 킹 Jan 12. 2021

각서 대신 엉덩이춤

※2003년 4월 호 "아름다운 세상" 책자에 실림 --- "SBS 손숙 · 배기완의 아름다운 세상" 방송된 글임


우리 집 남자와 저는 한 살 차이로 둘 다 40대 초반이고, 초등학교 3학년, 6학년에 다니는 아들 둘이 있지요. 평소에는 자상하고 가족들에게 잘하는 남편이지만 잠들었을 때 누군가 옆에서 깨우면 으르렁거리는 호랑이로 변해 가끔 제 마음을 아프게도 하지요. 우리 집은 작은방이 세 개 있는 아파트인데 큰아이에게는 방을 하나 따로 줘서 자게 했고, 작은아이는 우리 부부와 떨어져 자는 것을 싫어해서 안방에서 함께 잔답니다. 큰아이가 자는 방이 겨울에는 공기가 탁해서 그릇에 물을 떠 놓았는데  어느 날 보니 거미 한 마리가 빠져 둥둥 떠 있더군요.

  "이제 저 방에서는 못 자겠어요. 거미가 살다니! 으으~."

겁이 많던 큰아이가 혼자 자기 싫다며 베개를 들고 안방으로 옮겨 온 뒤, 좁은 안방에서 식구 네 명이 함께 자게 되었지요. 그런데 추운 겨울에는 그럭저럭 잘 지냈지만 여름이 되니 네 명이 자기에는 안방이 덥고 좁았어요. 또 놀고 있는 방들에게도 미안해서 안방을 아이들에게 내주고 우리 부부는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잠을 잤지요.


그날은 아이들 책상이 있는 방에 요를 깔고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문득 춥더라고요. 남편이 등을 돌리고 새우처럼 구부리고 자는데  왜 그리 안 돼 보이든지 제 쪽에는 요가 넉넉했지요. 남편 몸이 차가운 방바닥에 닿았을 것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왼손으로 남편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속으로

  '이곳, 넓은 곳으로 와서 편히 주무시와요.'

했는데  갑자기 제 손을 확 뿌리치며

  "왜 자는 사람 못 자게 깨우는 거야! 씨이~."

하며 막 화를 내는 거였어요.

  '내가 그랬나?  잠을 깨웠다면 미안하네.'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잠을 자려고 하는데 어느 사이엔가 잠은 저 멀리 달아나고 제 속마음도 모르고 소리를 지르는 남편에게 서운하기도 하거니와 얄밉기까지 하더군요. 정말 다른 뜻 없이 오로지 남편을 내 옆자리 이부자리로 와서 편히 자라고 끌어당긴 것뿐이었는데…….

저는 진심을 몰라주는 남편 곁을 떠나 아이들이 자는 안방으로 갔지요. 아침이 되자 남편은 슬며시 다가와 저를 끌어안으려 하는 걸 밀어내며

  "아마 자다 싸워서 각방 쓰는 부부는 우리밖에 없을 거야. 차가운 바닥에 자는 게 안쓰러워서 건드린 것뿐인데 치사하게 성질을 부리우?  앞으로 당신과 함께 자나 봐라."

그 뒤부터 저는 아이들 방에서 지냈죠. 남편은 밤이면 아이들이 잠들기를 기다렸다 저를 끌어내려 애썼지만 무거운 제 몸무게에 밀려 외기러기 신세가 되었답니다.

근데 참 이상하더라고요.  '미안하다. 다시는 그러지 않으마.' 하고 반성할 줄 알았던 남편이 실실 웃으며 그런대로 잘 지내는 거예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

싶어 저녁에 집을 나서며 남편이 들으라는 투로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 때문에 집 나갈 거야. 오늘 밤에 안 들어올 거야."

라고 목에 힘을 주며 말하니 소파에 누워 있던 아들 녀석들은

  "하하하, 엄마 살 빼려고 운동 가시죠? 다 알아요. 운동화 신고 줄넘기 가지고 가실 거잖아요?"

하는 게 아니겠어요. 최소한 엄마가 집을 나가서 안 들어온다고 하면 펄펄 뛰면서

  '엄마, 가지 마세요. 엉엉.'

할 줄 알았는데 콧방귀만 뀌는 아들 녀석들까지 무심한 남편을 닮아서 그러는 거라고 씩씩대며 집을 나섰습니다. 한참을 걷다가 서점에 가서 이 책 저 책 보며 시간을 때웠지요. 서점 문을 닫으려 할 때쯤에야

  '흥, 지금쯤은 날 찾고 있겠지. 내 말이 거짓이 아니란 걸 느끼겠지.'

생각하며 어슬렁거린 뒤에야 집으로 돌아오니 큰아들이 문을 열어주더군요.

  "아빠는?"

  "엄마 찾으러 나가셨어요."

  "그럼 아빠 들어오면 엄마 안 들어왔다고 해. 안방 화장실에 숨어있을 테니까."

작은아이는 벌써 자고 있었고 큰아이는 곧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나 봐요. 글쎄 엄마가 들어오지 않아도 걱정 없는 아이들을 보니 평소 인정 없이 키운 제 잘못인지 아님 아예 엄마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는 것인지 궁금하더군요. 씻은 뒤에 잠옷으로 갈아입고 누우려니까 큰아이가

  "엄마, 이 책하고 지갑 보면 아빠가 아실 텐데 어디다 둘까요?"

하더군요.

  "아 참!  네가 안 보이는 곳, 아무 데나 놔둬."

저보다 한 수 위인 아들 녀석의 세심함에 웃음이 나오더군요. 현관문에서 남편이 들어오는 소리가 나자 전 후다닥 안방 화장실에 가서 숨었지요. 남편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큰아들한테

  "엄마 휴대폰 가지고 갔니?"

라고 묻자

  "몰라요, "

라고 대답하는 능청스러운 큰아들 연기에 전 쿡쿡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있다가

  '에이, 들키면 말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죠.


전 포기하고 아예 자고 있던 작은아이 옆에 누웠습니다. 슬며시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현관문 여닫는 소리를 몇 번 더 아득하게 들으며 아침에 일어났어요. 남편이

  "이 여자가 어디 갔다 온 거야?"

하고 푸석한 얼굴로 다그쳐 물었지만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요. 제가 집에 들어온 것을 모르는 남편은 그날 밤 엄청 걱정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요?  아내 마음을 잘 헤아려서 잠잘 때 깨워도 결코 화내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했지요. 쓰지 않겠다고 떼를 쓰다 제 발바닥에 볼펜으로

  '각서, 밤에 잠잘 때 깨워도 화내지 않겠음.'

이라고 쓴 걸 제가 씻으면 사라지니까 종이에 써 달라고 했죠. 그래야만 같이 자겠다고요. 그랬더니 엉덩이로 쓰면 안 되겠느냐며 엉덩이춤을 덩실 추더니 결국 종이에 썼답니다. 우리 집 부부 싸움은 결국 이렇게 해서 막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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