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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븐 킹 Dec 30. 2020

우리는 사랑일까?


※< MBC 라디오시대>에 방송됨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2017년 11월 6일, 11월 17일(주간 베스트)


명절이 즐거웠던 이유




신혼시절에 읽었던 임철우의 ‘포도씨앗의 사랑’이라는 단편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그 소설에 나오는 젊은 연인처럼 포도를 먹으며 씨앗을 연인의 얼굴에 뱉어보고 싶다는 야릇한 희망을 남몰래 품어왔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포도를 사 와서 먹는데 문득 그 희망이 떠올랐다. 그러나 차마 남편의 얼굴에 포도 씨앗을 뱉을 용기는 나지 않아 소설 이야기를 했더니


“그래? 그럼 우리도 뱉어보자!”


남편의 동의를 얻어 유치하지만


“퉤~”


뱉고 얼마나 즐거워하며 웃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장난이 심해져 포도 씨앗이 아닌 침까지 얼굴에 튀겨 짜증을 불러오기까지 했던 기억이 선명하게 있다.


세월이 흘러 우리 부부는 오십 중반을 넘는 나이가 되었다. 얼마 전 친구에게


“요즘 읽을 만한 책이 뭐 있을까?”


프랑스 작가인 알랭 드 보통이 쓴 <우리는 사랑일까>를 권해서 가까운 도서관에 가서 빌려 와 읽게 되었다. 그런데 그 책을 읽다 유독 내 마음에 남는 대목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누군가의 인품을 빨리 알고 싶다면 우유를 한 모금 입에 가득 머금었다가 뿜어 보라’였다. 퇴근하고 들어온 큰아들에게 그 대목을 보여 주며


“아마 너는 욕하거나 화를 내겠지? 네 아빠는 어떨 것 같냐?”


“…….”


아들과 상상을 해봤지만 특별히 나올만한 반응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명절을 맞아 시댁에 갔다. 시어머니는 몸이 불편한지 안방에 들어가 주로 낮잠을 주무셨다.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그 소설 대목이 떠올랐다.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TV를 보던 남편에게 소설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당신 인품이 어떤지 테스트해볼까?”


“인품? 나야 인품 좋지. 해보나 마나지.”


“그럼 테스트해 볼 테니 조금만 기다려 봐.”


씩 웃으며 큰아들을 쳐다보니 아들 역시도 미소를 머금고 슬슬 자리를 피해 주방으로 갔다. 난 ‘큭큭’ 나오려는 웃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먼저 행주를 손에 들고 냉장고가 있는 다용도실로 가서 우유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런데 어찌나 다음 상황이 그려져 웃음이 나오던지 그만 ‘켁켁’ 대며 우유를 뿜을 뻔했다. 얼른 우유를 삼키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우유를 한 입 머금고 거실 소파에 누워 있는 남편을 향해 행주로 얼굴을 가리고 다가갔다. 그리고


“푸~”


뿜었다.


“하하하”


“헉!”


남편은 하얀 천을 뒤집어쓴 귀신처럼 우유로 범벅이 되어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씻었다. 어찌나 웃음이 나오던지 안방에 누워계시는 시어머니가 눈치 못 채도록 소리를 죽여가며 웃어댔다. 주방에 아들 녀석도 뒤로 넘어질 듯 배를 잡고 웃었다. 하지만 난 소파에 튀긴 우유를 행주로 열심히 닦으며 후한이 두려워졌다.


“ 아이 시, 옷에서 우유 냄새난단 말이야.”


하며 남편도 껄껄 웃는 게 아닌가 그래서 안심을 하고 난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깔깔대고 있는데 갑자기 주방에서


“나도 당신 테스트해볼게”


하며 피할 시간도 주지 않고 나에게 와서 뿜었다.


“푸~”


벼락을 맞은 느낌이랄까? 다행인 것은 우유가 아닌 물이었다. 그 물이 내 귀에 들어가 고생을 하긴 했지만. 남편도 지지 않고 물로나마 복수를 한 것이다. 물론 내 죄가 커서 끽소리도 못 냈다.


시동생네가 늦게 와서 큰 며느리인 내가 파김치, 배추김치 혼자서 담고 산적 등을 만드느라 힘들었지만 그 소설 속에 나온 대목을 실행해 보느라 즐거운 추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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