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직장 동료들과 잡담을 하다 퇴직하면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겠다는 어느 선생님의 말에 나와 다른 동료는 학을 떼듯(여기서 학은 말라리아를 한자어로 학질이라고 한다) 소스라치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옆 동료의 말을 빌리자면 친정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로 일하러 가셨다가 돈을 많이 벌어왔지만 몸을 다쳐서 시골 외할머니 댁의 가게로 들어갔다고 한다. 일명 점빵(경상도 사투리)으로.
나보다 열 살 정도 어린 그녀는 내가 담배 농사 이야기를 꺼냈더니 자기는 그 담배 진이 손에 묻었는데도 몹시 즐거웠단다. 하지만 벌레를 무서워해서 다시 시골로 가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나 역시도 그 지긋지긋한 농사일이 싫을뿐더러 지렁이, 거머리, 벌레 등이 그녀처럼 싫어서 절대 가지 않겠다고 했다.
내가 어렸을 때 농촌은 정말 가난했다. 60~70년대는 우리나라 전체가 그랬을 것이다.
특용작물을 재배한답시고 어느 날부터 담배농사를 지었는데 뙤약볕에 담뱃잎을 따서 지푸라기로 묶어 말리는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연한 검은색의 담배 진이 손에 묻으면 몇 날 며칠을 끈적이며 살아야 했다. 씻어도 잘 닦이지 않는 이상한 성분으로. 수매를 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말려야 하는데 너무 말렸다 싶은 것은 쌓인 눈 위에 펼쳐 놓고 수분을 흡수하게 하는 일도 했는데 눈 온 날은 가끔 그 짓도 해야 해서 힘들었다.
그나마 우리에게 껌이 있어 즐거웠다. 질겅질겅 껌을 씹으며 일의 고달픔을 껌으로 달랬는지 모른다. 마을에 있는 점빵(점방)에서 사 온 껌은 그 시절에 비싸서 한 통을 사 와 형제들이 나눠 먹고 씹던 껌을 안방 벽지에 붙여놓았다가 다음에 또 씹고를 반복했다. 코로나 세상에 이 이야기는 젊은이들이 들으면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가끔 자기가 씹던 껌의 위치를 까먹어 형제 것을 뜯어먹다가 성질 까다롭기로 소문난 언니에게 걸려 혼난 적도 여러 번 있다. 보통 집집마다 자식이 있는 집은 그런 광경으로 벽지가 조금씩 쭉 뜯겨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더 가난한 집의 아이들은 길바닥에 씹다 버린 껌을 주워 씹기도 하던 시절이다.
무슨 연유로 내가 껌종이를 모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 집 장롱에는 어렸을 때 모았던 껌종이가 한 움큼 있다.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사진 넣었던 후지필름이라 쓰여있는 비닐봉지에 소중하게 넣어져 있다. 펼쳐놓고 사진으로 찍어 추억을 소환해본다.
롯데껌과 오리온껌(2개)
나는 해태 팬이라서 프로야구 경기도 열심히 응원했다 지금은 기아로 바뀌었지만 그때 난 해태 마니아였다. 껌은 아무거나 씹었지만 그래도 해태 껌에 더 손이 갔다. '한마음, 들국화, 모든이껌, 커피껌, 숙녀껌, 아카시아껌, 수노아, 향기나껌, 쥬시후레쉬, 들국화 등등'
우리 추억의 껌이다. 내 친구들이 이 글을 본다면 탄성을 지르며 좋아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관하고 있을 줄 아무도 모를 테니 말이다. 이것들은 내 일기장이며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 통신표, 중, 고등학교 성적표, 상장 등을 시집올 때 챙겨 와서 고이 장롱에 넣어둔 덕택이다.
해태껌
껌종이를 보니 생각보다 화려하다. 약간 촌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겹다. 꼬맹이던 내가 아들을 장가보내기까지 했으니 세월 참 빠르다. 그 시절에는 지금의 코로나가 있을 것이라 상상도 못 했는데. 벽지에 붙여놓고 떼먹었던 껌 생각을 하면 얼마 전에 있었던 일처럼 생생한데 꼭 원시시대에 살다 온 느낌이 들어 아들 세대에게는 말도 못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