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에 깜짝 놀랐다. 내가 어린이집을 운영하며 무척 힘들어할 때도 그녀는 승승장구했다. 처음에 나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영아전담 가정어린이집을 운영했다. 작은 평수라서 큰 곳으로 갈아타고 싶어 해서 친하게 지내는 원장이 팔려고 내놨다는 어린이집이 있다 하여 다리를 놓아주었다. 그랬더니 오○ 원장이 자기가 하고 싶었다며 우리 사는 아파트로 찾아와 펑펑 울다시피 했다. 자기가 돈만 있으면 그곳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저녁 늦은 시간에 아파트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나더러 커피를 타서 내려오라고 하더니 차 안에서 훌쩍거리며 나를 원망했다. 그 어린이집을 하고 싶다며. 그래서 나는 오○어린이집 원장을 위로해 주었다. 큰 평수의 아파트 단지로 가 봐야 아이들도 많지 않고 교사를 더 쓰면 남는 돈도 없다며 알차게 현재 운영하는 각자의 어린이집을 잘 운영하자고.
내가 어린이집 원장으로 지내는 5년이 넘는 시간은 정말 힘들었다. 보육료를 정부에서 어린이집으로 지원을 해준 2년 정도만 잘 돌아갔다. 그때는 원아를 골라서 뽑을 정도였다. 어린이집에 서로 보내겠다고 줄을 섰다. 하지만 다시 정부 차원에서 논의를 한 끝에 아주 어린 영아들은 부모가 돌봐야 한다며 집에서 보육을 하면 각 가정으로 20만 원을 부모 통장으로 넣어주었다. 그렇게 법을 정하니 영아전담 어린이집은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어느 해인가는 나도 어린이보다 교사가 더 많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원아가 많거나 적거나 급간식비는 책정이 되어 있어서 늘 적자로 교사 월급 주기도 버거웠다. 남편 월급을 차입으로 잡아 교사들 월급을 주고 나는 원장이지만 땡전 한 푼 가져오지 못했다. 그런 나를 보고 남편은
"마트에서 캐셔를 해도 그 보다는 낫겠다."
핀잔을 주어 더 힘들었다. 그때의 심정은 지나가는 아이 보면 붙잡아 우리 어린이집에 모두 오라고 하고 싶었다. 실제 놀이터에서 아이와 노는 엄마를 꼬드겨 우리 어린이집에 구경 오라고 해서 다니게 한 경우도 있다. 나는 어린이집을 비싼 권리금을 주고 샀는데 다행히 조금의 빚만 냈을 뿐이라 적자였지만 감당할 수 있었다. 관리비나 운영비가 오히려 부담이었다. 시댁에서 농사지은 쌀이며 고춧가루, 마늘, 콩 등으로 밥을 해서 먹였지만 젊은 부모들은 알아주지 않았다. 모든 급간식 재료를 국산만 고집했는데 외국산이면 어떠냐고 따지듯 물은 어머니도 있어서 아연실색했다. 이웃 원장들과 어린이집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서로 위로를 하며 지냈다. 그때 꿈○어린이집 원장은 하던 곳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우리와 먼 곳으로 평수를 늘려 갔다. 그리고 그녀는 더 잘 운영했고 나는 CCTV를 단다는 해의 연말에 어린이집을 일반 가정집으로 팔았다. 지금도 어린이집 정리하고 남은 사물함이며 바구니, 동화책, 산타 복장 등이 베란다에 한가득 있다. 그때 웬만한 물건들은 아는 원장들에게 무상으로 주고 왔다. 칠판을 꿈○어린이집 원장한테 주었던가 보다.
“원장님, 원장님이 칠판을 줬다면서요. 그것을 이번에 정리하면서 원장님 생각이 많이 나더래요. 그리고 자기가 왠지 패배자가 된 기분이 더래요.”
나는 그 말에 내가 칠판을 줬던 기억마저 없음을 알았다. 모든 물건을 근처 아는 원장들에게 가져가라고 했는데 누가 무엇을 가져갔는지 기억에 없어서. 하다못해 책상이나 안전 거울도 아는 학부모에게 주기도 했다. 내가 어린이집을 정리할 때 꿈○어린이집 원장은 끝까지 운영하겠다고 했다. 원장 하다가 교사하기 싫을뿐더러 한 명이 있더라도 나중에 손주 생길 때까지 하겠다며 의지를 다졌던 것이다. 그렇게 각오가 대단한 원장인데 요즘 아이 안 낳는 세상이고 국공립어린이집이 많이 생겨 웬만한 가정어린이집이나 민간 어린이집은 운영하기가 힘들어 버티지 못하고 폐업을 하니. 3명 남은 원아를 혼자 도저히 볼 수 없어 문을 닫았다고 한다. 얼마나 속이 쓰렸을지 짐작이 간다. 내가 5년 전에 8명의 영아로 정리를 해서 겪은 일이기에.
꿈○어린이집 원장은 약간 얄미운 사람이다. 자기 잇속은 꽤나 따지고 말도 함부로 하는 편이라서 나는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의 딸이 시집을 간다고 해서 부조금을 했는데 내 아들이 장가갈 때 아는 척도 안 해서 그러려니 말았는데 막상 어린이집 문을 닫았다니 측은한 생각이 든다. 그렇게 의지가 강해도 시류를 역행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지금도 생각난다. 내가 어린이집 문을 닫던 해에 원아가 없어서 그 답답함을 달래려고 동사무소에서 운영하는 기타반에 가서 기타를 배웠던 생각.
하긴 음계를 잘 보지 못해 결국 로망스 치다 말았다. 가정 어린이집은 2학기가 되어야 원아가 다 찬다. 그러면 1학기에는 만성 적자에 허덕인다. 나처럼 자가로 한 사람들도 버티기 힘든데 임대로 하는 경우는 더 버티기 힘들다. 그런데다 가끔씩 뉴스에 아동학대 사건이 터지면 우리 어린이집 교사나 원장을 괴물로 본다.
내가 유아교육을 전공한 이유는 취업 걱정이 없어서 한 것인데 요즘은 취업을 해도 어린이집에서 교사나 원장으로 보내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잘해도 애 본 공은 없다는 속담이 맞다는 생각이다. 이제 어린이집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시대는 갔고 문을 닫는 경우가 허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