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나이에 km만 붙이면 된다는 말이 있는데 내 나이가 이제 시내 주행속도 정도는 넘었다. 에휴, 빠르다. 앞으로 얼마를 더 살지 모르겠으나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이 때 심정을 기억하려나? 아마 충분히 기억하고도 남으리라.
교우 관계로 속 썩인 적 없는 작은놈이 교대를 가겠다고 여러 군데에 원서를 냈다. 수시, 정시에 넣은 교대란 교대는 다 떨어지고 마지막 한 곳 정시에 낸 인천대에 합격하여 갔을 때 꿈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하며 속상해했다. 그렇게 반 학기를 학생증도 만들지 않고 가짜 대학생이라며 다니더니 어느 날 심각한 얼굴로 와서 반수를 하겠다고 했다.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 교대를 가겠노라고 선언을 했다. 백세 시대에 재수 한 번 정도는 하게 해 줘야 할 것 같아 그러라고 했다.
4개월 정도를 재수학원 다니며 열심히 공부하더니 수시에 예비번호 받아 간당간당하게 지방 교대에 붙었다. 어깨에 날개를 달은 격이라 좋아했다. 어미인 난 인천에서 그 먼 곳까지 거리를 생각하며 걱정스러웠지만 그래도 교대에 갔다는 이유만으로 덩달아 좋아했다. 그리고 4년이 흘렀다. 임용고시는 당연히 집이 있는 인천에 지원했다. 70명을 뽑는 좁은 관문이지만 다행히 응시 인원이 많지 않았으며 최선을 다했으니 붙으리라 믿었다.
필기시험 결과를 기다리는데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떨어졌다 했다. 설마 했다. 큰아들을 시켜 다시 알아보니 교직논술이 과락이란다. 교육과정 점수는 높게 나왔지만 논술 과락으로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진 것이다. 과락만 아니었으면 무난히 합격했을 것이라는 큰아들의 진단이 더 가슴을 후벼 팠다. 에미가 전직 글쓰기 학습지 교사였지만 남의 아이들 글쓰기 지도는 했지만 정작 내 아들 글쓰기는 소홀했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얼마나 속상하던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 결과를 묻는 시누이나 언니가 원망스러웠다. 별생각 없이 결과를 물어올 친구들이 떠올라 연락을 모두 끊었다. 땅속으로 꺼지고만 싶었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임용고시에 떨어진 작은놈 상심이 제일 컸겠으나 나 역시 몹시 속상했다. 두 번 다시 안 올 기회를 놓친 것만 같아. 한탄으로 서러웠다. 그렇게 간절히 합격하기만 빌었는데. 믿지도 않았지만 내게 가혹한 형벌인 것 같아 모든 신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년을 보냈다. 측은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작은놈에게 퍼붓기도 하고 얼마 동안은 마음으로 포기도 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아들은 밤늦게까지 방탕하게 게임을 하기도 했다. 불면증이라 잠을 이룰 수가 없다고 했다. 차리리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라고 했지만 더 정신이 말짱해진다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천장에 양을 수천마리 수억마리를 그려보아도 잠을 이룰 수가 없다며 그 즈음 정신과에 가서 수면유도제를 타와 먹기 시작했다. 마음먹기 달렸는데 정신상태가 문제라고 쏘아붙이며 싸우기도 여러번 했다. 녀석은 그런 자기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발악을 했다. 새벽 3시~4시까지 뒤척이다 늦게 잠들기를 반복할 때 지옥이 따로 없었다. 옆에서 보는 어미인 나는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배 아래로 갑자기 피부가 뒤집어져 피부과에 가니 도장 농가진이라고 한다. 밤마다 잠을 못 이루고 긁어대니 피부인들 좋을리가 없다. 무슨 큰 피부병처럼 보여 가족도 옮는 것이 아닌가 두려울 정도였다. 임용고시 날짜가 다가와 6개월 기간제 교사를 마치고 공부에만 전념했다. 비정규직의 설움을 받아 자극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더 절실하게 공부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시 필기시험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지금, 이 두렵고 무섭고 떨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심정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하랴? 당사자와 우리 식구만 알 것이다. 마음속에 합격이란 단어 하나 품고 산다. 그 씨앗을 심고 새싹이 돋아나길 애타게 바라본다. 군대도 안 다녀왔는데……. 이 절박한 심정을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믿어보련다. 나름 열심히 했으니 합격하리라고. 작년보다 더 많은 지원자로 경쟁률이 치열해졌지만. 남들보다 2년이나 뒤쳐졌지만 작은아들의 꿈은 반드시 이루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