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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븐 킹 Feb 02. 2021

아들을 위하여

 “동생이 불쌍해!”

  공립 초등교사 지역별 선발 예정 인원 숫자가 발표 되었을 때 작은아들이 어느 지역으로 임용고시를 치러야할지 막막할 거라고 큰아들이 걱정하는 소리이다. 내 입에서도

  “아우, 그러게 말이다. 우리 아들 어쩌니?”

  혀를 끌끌 차며 우리나라 교육정책에 반감을 드러내고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사실 학령인구가 줄어든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명박 정권 때부터 있어온 일인데 그에 대한 대비는 전혀 하지 않고 전국의 교대 신입생을 그대로 뽑은 것이 문제였다. 이미 출생아 수의 감소로 어린이집이 문을 닫는 곳이 많고 초등학교도 학생 수가 줄어 농어촌은 문을 닫거나 통폐합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을 다 아는데 정부만 눈 감고 귀 막고 있었던 모양이다. 특수목적대학교인 교육대학교도 진즉에 신입생 수를 줄였어야 했다는 것이다. 경찰대는 경찰로, 육·해·공사는 군인으로 법령이 정해져 있다. 교육대는 초등교원으로 ‘경쟁을 통해서’라는 단서가 법령에 붙어 있어 그 단서로 인해 어디다 대고 크게 항의하지도 못한다.

  경쟁률이 일반 공무원보다 낮으니 억울해 하지 마라는 여론에 반기를 들고 싶다. 내 친구가 초등교사를 할 때는 대학교 4년 내내 신나게 놀았다 한다. 그래도 전원 성적순으로 도시와 섬으로 나뉘어 교원이 되었다. 그 때에 비하면 격세지감이 들겠지만 큰아들이 초등교사가 되던 몇 년 전만해도 60% 이상은 경쟁시험을 통해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집이 인천인데 대학교는 지방에서 다니고 있어 시험을 인천으로 본다하면 1차에 이미 가점을 놓친 상태에서 70명 모집에 응시를 해야 하는데 경인교대 졸업생만 400여명에 이르고 타 지역의 학생이 수도권을 목표로 시험을 보러 온다면 경쟁률은 더해진다. 재수생을 더한다면 상상하기도 어려워진다. 그나마 집과 가까운 경기 지역으로 시험을 본다 해도 올해 뽑는 교원 수는 작년에 비해 반 토막이 난 상태라 떨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물론 섬 지역이나 낙후된 지방으로 시험을 본다면 가능성은 조금 나아지지만 그 곳에서 교사 생활을 가정한다면 집도 새로 얻어야하고 생활비,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다 만나면 차비 면에서도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교육대학교는 초등교사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특수목적대학교이다. 사범대학교와 같이 생각하면 오산이다. 교육대는 복수전공할 수도 없고 졸업하면 사범대처럼 학원 강사 노릇도 거의 할 수 없다. 11월이면 임용고시를 치러야 하는데 갈 곳이 없는 교대 대학생들이 얼마나 황당하면 코앞에 시험을 놔두고 데모를 하겠는가?  누구에 잘못인가?  솔직히 그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열심히 공부해서 바늘구멍인 교대에 들어간 죄 밖에 없다. 그들에게 생업을 포기하라는 소리다.

  작은아들이 초등교사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계기는 그가 초등학교 3학년쯤에 학교에서 사회 숙제로 이웃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면담 숙제 때문이었다. 이웃집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가족관계 등을 알아보는 숙제였는데 아들은 용감하게 앞집 현관 벨을 눌러 부부가 초등교사라는 사실과 세 살 먹은 남자 아이와 산다는 것을 알아오더니

  “엄마, 앞집 아줌마, 아저씨는 한 달에 얼마를 벌어요?”

  “글쎄 그 집은 두 명이 공무원이니까 우리 아빠의 두 배를 벌어오겠지.”

  “아, 그래요. 그럼 부자겠네요. 우리의 두 배라면……. 그럼 나도 이 다음에 교사해야지.”

  그 즈음이 추석에 가까웠는데 앞집에는 유난히 택배가 많이 왔다. 가끔 우리 집에서 물건을 받아 줄 때도 있었다.

  “엄마, 앞집은 왜 이렇게 택배가 많이 와요?”

  “글쎄다. 홈쇼핑을 할 수도 있고 학부모들이 명절 잘 보내라고 과일 선물 등을 할 수도 있겠구나.”

   그 시절은 부정청탁금지법이 생기기 전이고 촌지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명절에는 학부모들이 교사 댁으로 선물을 택배로 보내주는 게 유행이던 때였다. 그 사실을 안 아들은 교사라는 직업이 엄청 부러웠나 보았다.  내가 선물이나 월급으로 꿈을 정하면 안 되는 거라고 설명을 해줬지만 그 때부터 작은아들의 꿈은 초등 교사였다. 약간은 불순하게 꿈이 정해졌다지만 크면서 진정으로 아이들을 좋아하고 봉사하며 진짜 교사의 꿈을 간직하며 나름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고 3이 돼서 목표한 교육대학교에 원서 접수를 했다. 워낙 교육대의 인기가 높아 그 해에는 다 떨어지고 정시로 겨우 인천대에 들어갔다. 반 학기를 마치고

  “엄마, 나 반수할래요. 꼭 교대에 가고 싶어요.”

  그리하여 휴학을 하고 집과 먼 곳까지 학원에 다니며 열심히 공부하였다. 수시로 지방 교대에 원서를 넣었는데 예비 번호를 받아 겨우 턱걸이 합격을 했지만 아들은 낙하산을 탄 것 마냥 무척 좋아하며 방방 뛰었다.

  고등학교에 전교 16등으로 입학하여 1년 동안은 장학금을 받았다. 1년이 지난 후 10% 안에 들지 못해서 결국 장학금은 날아갔다. 그러더니 고 3이 되었을 때, 나에게 상장 같은 두꺼운 표지를 슬쩍 내밀었다. 펼쳐 본 나는 기절을 하는 줄 알았다. <장학 증서>를 그렇게 소리 없이 내색하지 않고 주어서. 5% 안에 들면 주는 장학금을 악착같이 공부하여 받고도 크게 자랑하지 않고 슬며시 내밀었으니 나는 무척 놀랐다. 형이 고등학교 3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을 때보다 몇 곱절 더 기뻤다. 기대하지 않았던 아이가. 별로 열심히 하는 것 같지 않아 기대도 안 했는데 그리 해서 더 놀라웠다.

  그 때의 감동을 두고두고 자랑질이다. 올 해 보는 임용고시에서도 아들이 엄마를 기절시켜 주길 바라고 바란다. 인천 임용고시를 볼 계획이라는데 경쟁률이 어마어마해서 걱정이지만 꼭 합격이라는 영광을 안을 수 있기를.

※ 2017년 10월에 쓴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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