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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븐 킹 Feb 06. 2021

삼수한 아들의 시험 보는  날

 2019년 11월 10일

  아침 일찍 저절로 눈이 떠졌다. 밥을 하려고 안방을 나서다 말고 아들이 잠에서 깨면 시험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아 밥은 아들이 깰 시간에 하자고 남편과 합의를 보았다. 그 대신 고양이 발자국처럼 살며시 걸어 현관문을 열고 조간신문을 가져와 읽었다.

  교대를 졸업하고 임용고시를 세 번째 본다. 어제저녁 그 녀석이 꼭 역 근처에 있는 빵집에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고 소보로나 카스텔라 중에서 하나를 사달라고 주문을 해서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아침 7시에 문을 연다는 빵집에 남편과 서둘러 나섰다. 조금 쌀쌀한 날씨지만 옷을 따뜻하게 입어서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횡단보도의 신호가 그런대로 발길이 멈추기가 무섭게 딱딱 들어맞아 기분 좋게 그 가게 입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불이 밝지 않고 커튼이 아직 드리워져 있어 고개를 갸우뚱. 아무리 문을 열려고 해도 안에서 잠갔는지 안 열렸다. 몇 번 시도를 하니 안에서 통통한 젊은 여자가 모자를 쓰고 유니폼을 입은 모습으로 나타나

  “저희 영업 아직 안 해요. 이따 8시에 여니까 그때 오세요.”

  “7시에 문을 연다고 해서 왔는데요.”

  라는 내 질문에

  “아니에요. 주말에는 8시에 열어요.”

  하며 인정사정 보지 않고 문을 닫았다. 순간 난감해졌다. 다른 커피점도 많은데 아마 녀석이 그 가게의 커피를 고집한 이유는 입맛에 맞아서일 텐데. 당황스러웠지만 얼른 머리를 회전시켜 해양경찰청 쪽에 있는 같은 상호의 가게를 떠올렸다. 자전거를 타고 갈 생각으로 집에 있는 큰아들을 시켜 자전거 두 대를 문밖으로 내오라고 전화로 부탁했다. 그런데 시계를 보니 7시 20분이니 큰 도로의 신호등을 지키기도, 지하도를 이용하기도 시간이 부족한지라 한쪽의 신호는 차가 오는지 안 오는지 보고 마구 뛰었다. 쉽게 말해 무단 횡단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 남편과 의견을 나누다 아무래도 자전거보다는 차를 가지고 이동하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커피를 가져오기도 차가 유리해 보였다. 남편은 서둘러 차 키를 가지러 집으로 갔다. 아들은 다행히 시험 장소가 집 근처인 중학교라 8시쯤 출발해도 8시 20분 입실 시간을 맞출 수가 있어 커피도 그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곳 빵집은 벌써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얼른 사서 집으로 가져오니 7시 40분이었다. 남편과 나는 아들이 말한 빵집에서 사 온 것처럼 입을 맞추기로 했다. 어차피 상호도 같으니 맛이 조금 다르기로서니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야 아침밥을 했다. 시험 보는 녀석은 아침밥 대신에 사과 몇 조각을 먹고 학교에 가서 빵과 커피, 귤로 식사를 대신할 참이라고 했다.


  첫 번째 가게에서 집으로 달리기를 하며 횡단보도를 건널 때 건물 옥상에서 까치가 유난히 깍깍거리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아무래도 좋은 소식을 줄 것 같아서다. 며칠 전부터는 과일을 깎다가도 손에서 떨어지면 아들에게 주지 않고 내가 먹었다. 아들에게는 실수로 손에서 떨어진 포크로도 주고 싶지 않았다. 미신이겠지만 솔직히 내 마음이 그랬다. 올해는 더 조심하고 아들이 좋아하는 위주의 반찬도 자주 해 주었다. 시금치나물, 돼지 불고기, 계란말이 등. 물론 상전이 따로 없지만 죽으나 사나 올 일 년은 최선을 다해 시험 뒷바라지를 해 주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어미로 대단한 노력을 해서 음식을 해 주거나 잘해 주지는 않았다. 직장에 다닌다는 핑계로 얼렁뚱땅 엄마 노릇을 했다. 마음만 늘 무거웠을 뿐이다.


  첫 임용고시는 합격을 했을 것이라고 백 퍼센트 믿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논술 과락으로 필기에서 떨어져 얼마나 실망스러웠는지. 그 해는 논술 평가로 합격, 불합격을 판가름한 모양이었다. 결과를 묻는 친구들의 안부 전화가 그즈음 그리 짜증스러울 수가 없었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변명하기도 싫었다. 사실 1년 후에는 보란 듯이 친구들 앞에

  “우리 아들 합격했어.”

  하며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두 번째 시험에서는 1차 점수가 낮아서 2차 시험을 잘 봤지만 0.31인가로 떨어졌다. 1점이든 10점이든 떨어졌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삼수를 했다. 이번이라고 잘 리란 보장은 없지만 잘 보았길 간절히 바라본다. 요번 시험을 계기로 떨어지든, 붙든, 군대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아들인지라 정말 열심히 했을 것이다. 어느 해부터인가 경쟁률이 세서 합격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작년에는 불행으로 인천 경쟁률마저 최상위 권을 차지하여 좋지 않은 결과가 자꾸 겹쳐졌다.


  첫 번째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더니 두 번째는 마음을 꾸역꾸역 정리하게 되고 세 번째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랬더니 어느새 세월이 이리 흘렀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우리 아들처럼 시험의 노예로 살까? 나 같은 엄마들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을까? 물론 아들의 인생이 있고 내 인생이 따로 있다지만 어찌 어미 인생에서 아들의 취업이 남 일이겠는가. 그나마 큰 아들은 한 번의 시험으로 합격을 해 주어 내 근심이 없어서 감사할 일이다. 지금 생각으로는 작은아들만 합격해 준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하긴 사람 욕심이 끝이 없어 정년 하기 전에 남편이 더 높은 급수로 진급을 해 주면 좋겠지만.

  아들 몰래 시험장에 입실 시간이 될 때쯤 가 보았다. 후배들이 무리를 지어 응원을 나왔지만 예전처럼 부모들의 모습이 많이 안 보였다. 다시 한번 아들이 시험을 잘 봐주길 빌며 집으로 돌아와 큰아들, 남편과 함께 영흥도 목섬으로 향했다.


  1시 45분이 되니 작은아들이 전화를 한다. 시험이 끝났다는 것이다. 헷갈리는 문제가 많았다 한다. 약간 밝은 목소리이지만 두 번의 실패 탓에 스스로 조심을 하는 듯하다. 이제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 합격을 하면 다시 2차 시험을 봐야 한다. 아직도 갈 길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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